미국의 불교 붐(출처 :http://cafe.daum.net/AdConversion/HCVf/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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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9.07.18 조회3,33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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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불교 붐
류황태(동의대)
I. 들어가는 글
19세기 말에 마지막 20년 정도 미국에 불교 붐(boom)이 일어난다. 1883년 인도여행을 한 보스턴 교회의 목사 Phillips Brooks씨는 말하길, “당시 보스턴 사람들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기 보다는 불교인이라고 칭할 정도이다. 하여 나는 보스턴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자로서 부다가야를 방문하는 것은 나의 임무다”라고 말했다. 100만부나 팔린, 석가의 삶을 다룬, The Light of Asia라는 책은 이발소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이렇듯 대중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그러면 과연 언제부터 불교가 미국에 알려지기 시작했을까? 19세기 대부분의 시기 동안 미국인들에게는 불교뿐만 아니라 동양은 미지의 세계였다. 소수의 지성인들만이 동양에 흠뻑 빠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동양을 모르거나 혹시 조금이라도 아는 자들은 기독교가 아닌 이단의 나라 그리고 미개의 나라라는 반감을 가지는 상태였다. 풍문으로만 듣는 불교에 대한 지식이 전부였다. 즉 이상한 종교라는 것이다. 빈 것(空) 또는 없는 것(無)을 추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목적인 이해가 되지 않는 종교였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이전에 미국에 불교의 흔적이 있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중국의 황제가 불로초를 찾기 위해 사람들을 바다건너로 파견했다는 전해오는 이야기, 1990년대 발굴된 중국의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Hu-Sham이라는 승려가 458년에 미국 대륙에 다녀왔다는 기록도 있고, 중국인들이 캘리포니아지역으로 갔다는 주장 그리하여 불교가 왕성한 중국 당나라 문화가 남부 캘리포니아를 거쳐 中美의 마야와 잉카문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국가간의 문제의 소지도 있고, 백인이 유색 동양인에 대한 우월감, 정치적으로 이유로 이런 부분을 연구하지 않을 소지도 충분히 있다. 태평양연안의 동양의 나라들이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바다의 저쪽 끝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도 맞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인의 태평양횡단의 시도도 전혀 불가능한 주장은 아닐 것이다. 중남미의 마야나 잉카의 돌석상들이 중국을 통해 받은 불교의 흔적이라는 주장은 아직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제기되지 않고 있지만 연구할 대상은 충분히 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미국의 인디언 역사와 불교역사의 많은 부분이 다시 씌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연구가 되어있지 않고, 지역적으로도 미국대륙의 범위를 벗어나고 있으며, 전승되어지지 않고 있다. 이 논문은 19세기 말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일어난 불교 붐의 배경, 실태, 의미에 대해 알아본다.
II. 식민지시대와 19세기의 선교사들이 보는 동양
식민지시대에 잉글랜드의 퓨리탄 목사인 Cotton Mather (1663-1728)가 터어키 제국에 관심을 가지고, Elihu Yale (1649-1721)같이 동양에서 살았던 사람과 접촉했다는 기록도 있다. 영국에서는 18세기 전반기에 동양의 이야기들이 전파되고 유행했었다. 1794년에 아라비안 나이트(Arabian Nights)가 번역되어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18세기 말 경에는 Royal American Magazine (1774-1775), Boston Magazine (1783-1786), American Magazine (1887-88)에도 동양의 이야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로 중동의 것들이고 약간은 극동의 것도 있었다. 예를 들면, 중국의 왕자가 고난의 길을 뚫고 인도로 가서, 법을 배우고, 다른 아시아 국가나, 아프리카, 유럽으로 가서 설법한다는 이야기 같은 것이다. 동양의 나라를 여행한 사람들의 여행기나 편지가 잡지에 소개되는 등, 차츰 동양에 기독교 세계와는 다른 문화와 풍습이 다른 나라들이 동양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기한 풍습이 흥미를 끌 뿐, 동양의 종교에 대해 깊은 흥미를 가지지는 못했다. 150년의 식민지 시기 동안 28개 미국의 정기간행물에서, 차나 도자기 선전을 제외한 중국에 대한 기사는 24개 이하이다. 인도에 대한 글에 관해서는 조사가 없었지만, 이와 비슷하다고 본다.
그러나 독립전쟁 후, 영국과의 교역의 단절은 다른 나라와 교역을 추구하게 되자 미국의 상선들은 동양으로 뱃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1784년에는 Empress of China라는 배가 중국 광동지역에 갔고 교역이 시작되었다. 가죽제품, 원면, 납, 인삼을 싣고 중국으로 가서 팔고는 차, 도자기, 담뱃대, 자개농, 그림 등등 자질구레한 중국의 물건을 보스턴, 필라델피아, 뉴욕으로 가져왔다. 같은 시기에 인도와도 교역이 시작된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2차 Great Awakening의 여파로 기독교 종파들은 앞다투어 서부로 복음전파에 노력한다. 무역과 함께 떠오른 동양도 복음전파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선교사를 보내는 대부분의 기독교 종파는 동양의 종교를 이단으로 여기고, 동양사회를 어둡고 비참하게 보았다. 1812년 첫 선교단을 보낼 때 Andover신학교의 교수 Leonard Woods는 말하길 “이단”의 아시아 국가의 “가난하고 불쌍하고, 못사는 아프리카인을 보라, 갠지스강에 종교적 희생물이 되는 인도 아이들을 보라. Moloch를 믿고 숭배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행열을 보라. 그러나 이들의 영혼의 우리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고귀하다.” 그리하여 기독교로 이들의 영혼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1818년 같은 학교 교수 Moses Stuart는 말하길 Juggernaut의 수레바퀴에 치여 죽으면 극락 간다는 힌두인들을 보라며 불순함과 피범벅이 된 인도를 그리고 있다.
이들 선교사들이 인도에 가서 보고 들은 것은 인도인들의 자신학대의 비참함이었다. 땅에 누워서 돌멩이로 자신을 치는 것, 눈이 멀도록 태양을 바라보는 것 같은 행위이다. 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은 큰 갈고리에 등살을 꿰어 나무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거였다. 그리고 suttee(남편의 장례식 불에 여자를 태워 죽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진리를 찾기 위해 감정과 고통을 다스려야 하는 고행의 수도자 모습에 대한 얘기에서, 미국인들은 동양의 종교는 비도덕적이고 무자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식민지 시절 동양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며, 동양 종교에 대해 학술적인 연구를 한 자도 거의 없는 편이다. 소수의 학자 중에 Hanna Adams(1755-1831)가 있다. 그녀는 동양 종교에 전문성을 가지고 글을 쓴 최초의 여성이라고 보여 진다. A View of Religions (1801)에서 미국인들이 자신의 종교인 기독교만 좋게 얘기하고 다른 나라의 종교에 대해 나쁘게 얘기한다고 말하며, 균형된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 이 책에서 주로 Yogi와 같은 인도의 종교관행에 대해 서술하고 있으며, 중국에 대해서는 도교, 불교, 유교가 있다고 간략히 서술하며, 불교는 외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2종류가 있으며, 외적인 것은 대중을 위한 것이며, 내적인 것은 순수한 무신론적인 것이며 공(void)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유교는 조상 숭배하는 종교라고 기술했다.
III. Unitarian과 Transcendentalist들이 보는 동양
선교사들의 의해 형성된 부정적인 견해와는 달리 소수 미국인들은 동양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Unitarian들이다. 19세기 말에 불교의 꽃을 피우도록 바탕을 마련하는 것은 19세기 Unitarian들의 노력의 결과이다. 즉, 이들과 이들의 후예인 Transcendentalist와 Free Religionist들이다. 미국의 기독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변화가 있다면 Unitarian적인 사고방식의 대두일 것이다. 이것은 미국문명의 어떤 맥을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맥이란 합리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이다. 미국문명은 종교에서 분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목사가 가장 유식한 계급이었으며 이들이 목사로만 남지 않고, 특히 Unitarian이라는 종파와 주변사회에서는 정치인, 문학가, 과학자, 의사 등등으로 나아가 미국문명의 다양화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즉, 퓨리탄의 종교적 이상국가에서 시작하여 차츰, 정치, 문학, 종교, 의학, 과학 등으로 분화해 가는 과정에서 Unitarian이라는 종파는 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신대륙의 무한한 자연은 식민지 사람들을 퓨리탄이라는 울타리 속에 가두어 둘 수 없었다. 아담과 이브가 지은 죄 때문에 후손 인간들을 모두 죄인으로 보는 그리하여 도덕적으로 살아도 구원의 희망이 없는 존재로 보는 캘빈이즘의 부정적인 시각에 대한 반발과, 근면 성실만을 추구하는 퓨리탄 사고방식은 그 결과 나타나는 부의 쌓임과는 모순되게 되었다. 개개인은 자신의 행복과 부를 추구하려고 퓨리탄의 테두리를 벗어나게 되었고, 교회에 가더라도 이런 새로운 미국적인 삶을 인정해주는 목사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의 신도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목사를 선택하는 권리도 있었기에, 목사들은 성서를 이런 신도들을 위해 달리 새롭게 해석해 주었다. 이들이 Unitarian들이다. 이런 Unitarian들의 태도는 종교적으로는 Deism,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의 미국을 형성해 가는 중심으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1805년경 Boston의 대부분의 교회는 Unitarian들의 손에 들어간다. 이것은 커다란 사건으로 현재의 미국의 문화의 다양화를 시작하는 사건으로 그 의미가 심대하다. 이들은 Harvard를 중심으로 그들의 종파를 발전시켜 나가며, 부수적으로 미국의 지성계를 형성해 나간다.
미국에서 동양의 종교가 받아들여지게 되는 배경은 이런 Unitarian적인 환경과 영국의 인도지배에 의한 산스크리트 경서들의 번역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9세기가 중반에 들면, 유럽인들은 인도의 Veda, Upanishad 같은 경서의 번역을 시도하게 된다. 영어를 쓰게 된 인도인들도 번역에 가담한다. 이 대표적인 예가 Rammohun Roy(1772-1833)이다. 그는 Vedanta경서나 Upanishads를 번역하고, 그의 인도종교개혁의 활동은 기독교인들의 관심을 끈다. 1821년과 1830년 사이, Unitarian의 기관지인 Christian Register와 Christian Examiner에 그에 대한 기사가 100개 이상이나 되었다. 힌두교가 관심의 큰 대상임을 말해준다. Roy의 영향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다른 힌두서적을 읽도록 했다. 이들이 독서의 목적은 힌두교를 배우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기독교를 인도에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과격한 Unitarian들인 Transcendentalist들은, 동양의 종교와 사람들은 우러러 보며 추종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동양인들은 도덕적으로 살며, God은 이런 자들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기에, 개종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1830년대에 접어들면서 동양연구의 주무대는 Transcendentalist에게로 넘어간다. Ralph W. Emerson, Henry D. Thoreau, Amos Bronson Alcott, George Ripley, Theodore Parker 등은 기독교를 비판하고, 기독교를 대체할 철학과 종교를 찾았다. 이들이 찾은 것은 힌두교였다. Rig-Veda, Laws of Manu, Bhagavad-Gita를 읽고 인도인들의 거대한 상상력 속에 나타난 대우주에 매료되었다. 진리를 깨닫는 신비한 경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스스로 이런 경험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이들이 불교 책을 보았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Emerson이 1846년 경 Edward Upham의 The History and Doctrine of Buddhism을 보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불교에 대한 지식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Emerson은 Gita를 불교 책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며, 불교는 인생을 고통으로 보는 어두운 종교라고 이해하고 있는 정도이다.
가장 반기독교적인 Thoreau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불교 문헌을 번역했다. Thoreau는 힌두교뿐만 아니라 불교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프랑스 동양학자 Eugene Burnouf의 프랑스판 연화경의 일부를 번역하여 Dial지에 “The Preaching of Buddha”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또 그는 1849년 또는 1850경에 Langlois의 Harivansa를 번역하여 The Transmigration of the Seven Brahmans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는 어쨌든 “my Buddha”라는 표현까지 쓰며 Transcendentalist들 중에서는 불교를 가장 좋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도 nirvana를 “annihilation"라고 번역했던 것을 보면,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은 것은 아닌 듯 하다. Theodore Parker는 동양 종교에 관심은 있지만 동양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는 순수하고 보편적인 한 가지 종교(보편종교)가 있으며, 어떤 특정한 시대와 지역의 종교는 이 보편종교의 변형된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세계의 다양한 종교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19세기 후반 Free Religionist들에 의해 계승된다.
Transcendentalist들이 동양 사상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하고, 동양 사상을 자신의 세계 속에 소화시켜보려고 한 최초의 인물들이다. 그들은, Thoreau를 제외한, 기독교를 선호했지만 동양을 배척은 하지 않았다. 이들의 역할은 미국이 동양에 대한 문을 열도록 한 것이며, 나중, 이들의 후예들이, 동양 사상을 더 추구하고, 불교 붐을 일으키는 데 직접 간접적으로 공헌을 한다.
IV. Free Religious Association과 불교
남북전쟁 이후, 1867년에 Free Religious Association의 창립은 동양 종교에 위한 커다란 도약이다. 식민지시대 이후, Unitarian들은 차츰 세력을 키워오다가 1805년 보스턴 지역을 장악했지만 내부적으로 분열의 요소가 많았다. 그들의 후예는 대단히 과격했다. 그리고는 결국 Unitarian이라는 종교에서 벗어나 Transcendentalist라고 불리었다. 미국에서 Unitarian들은 자신들의 교리라고 할 Unitarianism이라는 단어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영국의 Unitarianism에 연관되어 그냥 Unitarian들이라 불렸다. 명확한 교리의 정립이 안 되어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기독교의 역사에 나오는 기적들이 진짜인가 하는 질문, 예수가 신이나 아닌가 하는 질문들은 당시의 계몽주의, 과학주의 사회 환경에서는 정통 기독교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갈 소지가 있다. 이런 갈등에서 과격한 반기독교 경향의 목사, 주로 Transcendentalist들은 목사직을 버리고 떠났고, 교회에 남은 자들도 Theodore Parker처럼 과격하게 정통 기독교의 틀을 벗어나려는 자들이 많았다.
모든 종파의 선교활동은 남북전쟁 후에도 계속되었다. Unitarian들이 기독교내에서 살아남으려면 내부적으로 결속이 필요했다. 1865년 Unitarian들은 교리를 정립하기 위해 전국적인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보수온건파와 과격파로 분열된다. 온건보수파는 예수의 신성과 기독교의 기적들을 인정한다. 그러나, 과격파들은 이런 점들을 거부하고 모든 종교는 본질에서 똑 같다고 주장한다. 즉, 종교적 감정에서 시작하여, 종족의 차이, 환경의 차이에 의해 차별화가 되었다. 모든 종교들은 진화하면 종국에는 보편종교(universal religion)가 된다.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이 진화의 한 단계라는 주장을 한다. 또 기독교처럼 Christ만을 따르는 것을 지양하고 순수하고 보편적인 종교를 탐구하게 된다. 건전한 종교의 기초는 성서에 대한 믿음이 아니고, 직감에 의한 진리의 포착도 아니며, 다만 事實에 기초를 둔 체계적인 탐구만이 유일한 근거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종교는 과학이라고 주장했다.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차별 없이 연구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예수, 석가, 모하메드의 삶을 비교하자며 비교종교학을 대학에 설치하도록 한다. 이들이 2세대 Transcendentalist들로서 Free Religionist들이며 자신들의 모임인 Free Religious Association(FRA)을 창립한다. FRA는 1880년대 후반까지 활발히 활동하며 힌두교, 불교, 유교, 일본의 신도 등 동양 종교들을 소개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한다. FRA가 존재하도록 하는 데 공헌을 많이 한 것은 유럽의 동양학자들이다. 특히 Max Müller의 글이 FRA의 관점을 형성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Free Religionist들은 기관지인 The Index와 The Radical를 발간했다. Index지는 17년 동안 존재하면서 500편 이상의 동양에 관한 글을 실었다. 동양 종교의 교리를 연구하고, 기독교를 비교하고, 동양학의 진전사항을 보고하며, 극동의 선교활동을 보고하고, 미국으로 이민 오는 중국인에 대해 보고하고, 동양고전을 발췌하여 싣고, 동양에 관한 신간서적을 비평했다. Free Religionist들은 모든 종교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경전으로, 특정 종교의 배타성이나 우월성을 배제한 것으로, 모든 종교와 종파에서 예배에 사용할 수 있는 책을 만들려고 했으며, 선배들인 Transcendentalist들이 Dial지에 시도한 “Ethnical Scripture”같은 “Essence of All Faiths”라는 연재물을 시도했다. 이것의 내용은 기독교, 힌두교, 불교, 공자, 맹자, 노자, 플라톤, 괴테 등등 동서양을 총망라하는 것이었다. Free Religionist들에게는 힌두교의 신비주의보다는 실용적이고 윤리적인 유교와 그리고 종교로서는 과학적인 불교가 더 흥미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불교에 대한 문헌이 대단히 많아졌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연구가 가속되었다. 한두 사람들의 불교에 관한 활동을 살펴보기로 하자.
William Henry Channing은 1세대 Transcendentalist로서 동양 종교 특히 불교의 부흥에 이바지 한다. “The Tooth of Buddha”같은 동양에 관한 글을 여러 잡지에 기고한다. 1880년 Concord School of Philosophy의 모임에서 “Oriental and Mystical Philosophy”라는 강연에서 진짜 불교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강연이 끝나면, 청중은 왜 자신들이 아직도 불교도가 되어있지 않나 하고 야단들이다. 그는 사위인 Sir Edwin Arnold의 The Light of Asia의 미국판을 출판토록해서 불교 붐을 일으키도록 한다.
Thomas Wentworth Higginson은 2세대 Transcendentalist이다. 그는 FRA에서 비기독교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자였다. Athlantic Monthly나 Radical에 동양 종교에 대해 많은 글을 기고했다. 불교가 특히 흥미 있는 분야였다. Higginson의 “The Character of Buddha” 등의 글을 쓰면서 석가의 삶의 가르침을 요약하고, 석가를 위대한 종교지도자이며 개혁가라고 높이 평가했다. 예수와 석가는 2대 종교지도자라고 추앙했다. “The Sympathy of Religions”(1871)는 Radical지에 실렸는데 이 글은 가장 널리 유포된 FRA의 문서중의 하나가 된다. 그의 주장은 주변 동료들과 거의 같다. 모든 종교는 근본에서 같다. 모든 종교는 universal한 종교로 간다. 이 점을 인정하면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동감을 가진다. 매일매일 세계의 다른 종교에 대해 우리의 지식이 높아지고 있다. 이 종교들 사이에 이해가 넓어지고 있다. 결과는 one religion under many forms가 된다. 중심 요소는 “fatherhood of God”과 “brotherhood of man”이다. 기독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의 차이는 단지 다른 지도자의 이름이 있다는 점이다. 모든 종교는 자연종교에 창시자 개인의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진리가 어느 한 종교의 특정된 것이라는 것은 용서 못 할 잘못된 생각이다. Index에는 이렇듯 불교에 대한 많은 글들이 실린다. 그리고, C. D. B. Mill의 The Indian Saint, A. P. Sinnett의 Esoteric Buddhism같은 불교에 대한 책들이 한두 권 출판된다.
1870년대 초반기에 동양 종교에 대한 연구는 전성기를 이루며 미국 대중에게 불교를 알리는 책들이 나타난다. 3사람의 작품이 완성되었다. James F. Clarke의 Ten Great Religions (1871), Samuel Johnson Oriental Religions and Their Relation to Universal Religion (1872), Moncure Conway의 Sacred Anthology (1874). Johnson과 Conway는 동양 종교에 더 우호적이며, 보편종교의 입장이다. 그러나, 정작 불교를 알리는 것을 기독교 입장을 옹호하는 Clarke이다. 그는 보수온건파 Unitarian이다. 그는 1세대 Transcendentalist이며 주변 친구들과 같이 자유종교주의자들과 의견을 공유하지만, 최후의 순간 기독교의 원리에 머문다. 그는 기독교입장에서 다른 종교를 본다. 그는 불교와 기독교의 공통점을 나열하여, 미국 대중이 불교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도록 한다. 즉, 불교가 힌두교에 반동한 것은 카톨릭에 반동한 Protestant같으며, 석가는 루터와 같은 종교 개혁가이며, 공히 聖餐의식을 거부하며, 종교적인 계급조직을 반대하며, 지나친 儀式주의를 반대하며, 개인의 구원을 강조한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동양의 종교, 경서, 성인들이 기독교와 성경 그리고 기독교 성인보다 낫다고 보는 것을 틀렸다고 말한다. 오로지 기독교만이 다른 종교의 좋은 점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종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Clarke의 책은 학문적인 책이라기보다는 대중서 같은 것인데, 하지만, 미국 대중의 마음에 불교를 스며들게 하는 데는 가장 성공한 책이다.
V. 불교 붐
불교 붐은 Sir Edwin Arnold의 책 The Light of Asia가 일으킨다. Theosophy라는 단체에 의해 불교가 대중 속으로 파고들며, 미국인 동양학자들이 나타나며, 일본이 새로운 문화 교류국으로 등장하며, 1893년 세계종교들의 모임(The World's Parliament of Religions)이 정점의 사건으로 일어난다.
1879년 영국인 Arnold의 책 The Light of Asia가 불교 붐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책은 19세기의 한 커다란 사건이었다. 영국에서 60판, 미국에서 80판을 기록하고 100만권이 팔렸다. 이 책은 가장 불교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책이었다. Samuel Beal의 Abhinishkramana Sutra, Spence Hardy의 Manual of Buddhism, Max Müller의 Dhammapada같은 불교에 관한 다른 책들이 있었지만, 이 책이 인기가 가장 있었던 이유는 Arnold의 문학적인 재능의 공헌이 컸다. 기독교 독자의 구미에게 맞게 석가를 묘사하고 있다. 진리 탐구자의 모습을 한 석가를 묘사하고, 석가의 이야기 중에서 믿기지 않는 부분들은 생략했고, 인도에 살았던 경험에서 알게 된 인도의 특성들을 제거하고, 드라마틱하고 로만틱하게 석가의 삶을 묘사함으로서 서양인의 구미에 맞도록 잘 표현했다. 즉, 석가의 삶의 목적인 니르바나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해방이며, 무신론적인 면은 제거했고 대신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자비와 카스트라는 계급제도의 반대 등은 기독교 미국인들의 구미에도 맞도록 묘사했다. 불교와 기독교의 유사점을 강조함이 성공의 요소였다. 이 책의 미국에서의 성공에 기여한 다른 요소로서 저자인 Arnold의 아내가 Transcendentalist인 William H. Channing의 딸이며, 다른 우호적인 비평들이 도움을 준다. Transcendentalist들의 후예 또는 이들에게 강하여 영향을 받은 뉴잉글랜드의 지성인들은 “여자가 신비한 꿈을 꾸고 잉태하여 위대한 아기 탄생 이것은 예수의 탄생과 다를 바가 어디 있는가!” 하고 미국 대중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을 읽지 않은 자가 없다고 할 정도이다. 석가의 가르침이 가까이 와 닿는다고 말들 한다. Andrew Carnegie도 이 책을 읽고 좋은 책이라고 말하며 인도에 가보았다고 한다. 이후 20년 동안 불교는 줄기차게 화제꺼리가 된다. 불교의 장단점, 역사 등등을 따진다.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높아져 간다. 그 중 특이한 사건으로 테네시州의 의사인 Felix Oswald는 1883년 Index에 기고한 글과 나중 The Secret of the East라는 책에서 주장하길, 수세기 동안에 교회 내에서 비밀로 전해오는 얘기가 있는 즉, 예수가 불교도였다는 것이다. 많은 유럽의 학자들은 이 주장을 믿었다. 프랑스 동양학자 Eugene Burnouf도 이런 가설을 세웠고, 철학자 Ernest Renan도 예수가 불교 영향을 받았다고 믿었다. Rudolf Seydel은 성서와 불교경전에서 223개의 비슷한 구절을 찾아냈다.
이 문제는 러시아 저널리스트 Nicholas Notovitch에 의해 크게 부각된다. 1894년 파리에서 프랑스어로 발행되고 다음해 미국에서 번역된 그의 책 The Unknown Life of Jesus Christ에서 주장하길 예수가 인도에 살았고 그곳에서 불교를 공부했다는 것이다. 성서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은 예수의 13세에서 30세까지의 삶에 대한 것이다. Notovitch는 1887년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면서 티벳지역에 아직도 전해오는 “Saint Issa”에 대한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었고, Ladakh에 있는 Himis의 사원의 승려를 설득하여 이 경전 Life of Issa를 보게 되었고 복사하여, 러시아를 거쳐 프랑스로 가져와서 출판했다. Notovitch는 주장하길 이 경전은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후 3-4년 후 당시의 목격자가 쓴 것이라는 것이다. 내용은 13세의 예수는 상인들을 따라 팔레스타인에서 인도로 갔다. 6년간 Veda와 다른 힌두경서를 공부한 후, 불교스승을 찾아 나서고 다음 6년간 Pali어를 배우고 석가의 가르침을 완전히 배운다는 것이다. 성인 Issa라고 불리었다. 티벳 지역에서 머물다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설법하고 십자가에서 순교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8판 그리고 미국 3판, 영국에서도 2판정도 발행되었고, 영어와 프랑스어뿐만 아니라, 독일어, 스페인어, 스웨덴어, 이태리어로 번역되어 많은 관심을 팔렸다. 이후에도 가끔 다시 출판되었다. 기독교 측에서는 이 책을 사기극이라고 비난했지만, 이 책의 영향은 계속 남아있고,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계속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런 불교의 붐과 때를 맞추어 일어나는 것은 Theosophical Society의 탄생이다. 1875년 뉴욕시에서 시작한다. Helena Blavatsky, Henry Steel Olcott, William Quan Judge가 주요 구성원이다. Blavatsky는 러시아에 태어나 미국, 인도, 유럽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녀는 신비주의, 마술 등등 靈的세계와 靈力같은 데 관심을 가진 자로, FRA처럼 학자들이 아닌, 대중들을 상대로 아시아 종교를 추종하는 단체인 Theosophical Society를 만들고 회원을 모집했다. 에디슨도 회원으로 가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보다는 인도에 가서 활동을 한다. Olcott도 마찬가지로 Sri Lanka에 가서, 당시 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으로 종교마저 피폐해지는 상황에서, 미국인이라는 신분으로 종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는 Sri Lanka의 불교를 보호, 육성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여 나중 Sri Lanka의 영웅으로 추앙된다. Judge는 미국의 Theosophical Society를 성장시킨다. 1888년 25개 지부를 1896년에 100개로 널린다. 동양서적을 위한 도서관이나 동양학자를 육성하고, 대학에 동양학과를 만들고, 동양 종교들의 모임을 만드는 운동을 한다. Theosophical Society가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대중에게 동양 종교가 제시되었고, 추종자를 모집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미국의 불교 붐의 또 한 요소는 1890년대 미국인 불교학자들의 등장이다. 19세기에 선교사들의 활동과 동양학자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들은 거의 동양 언어를 몰랐기 때문에 유럽학자들에 의존했다. 이들은 대부분 독일유학을 했으며, 경서의 내용보다는 Sanskrit언어를 해석하는 데 중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1890년대에 미국인 불교학자들의 등장한다. 미국의 불교연구의 선구자라고 불릴 수 있는 Albert J. Edmunds (1857-1914)는 중년에 불교연구를 시작한다. Pali어를 독학하여 1902년 Dhammapada를 번역하여 “Hymns of the Faith”라고 이름 붙인다. 1904년에는 “원본으로 비교한 불교와 기독교의 경전들”을 영국불교협회지인 Buddhist Review에 기고한다. Paul Carus가 운영하는 Open Court지에도 기고하고, 그를 통해 D. T. Suzuki와 대승불교과 禪을 접하게 된다. 석가와 예수를 비교하던 유럽학자들과는 달리 Edmunds는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한다. 그리하여 불교가 기독교에 영향을 미쳤고, 기독교가 나중 불교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Henry Clarke Warren (1854-1899)는 Pali어를 공부하고 체계적인 불교연구를 시작한다. 그의 “Buddhism in Translations” (1896)은 Harvard Oriental Series 연재되고, 호응이 대단하여 계속 출판된다. 그는 석가의 가르침은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 가르침이 없다고 말한다. William Woodville Rockhill (1853-1914)은 중국외교관으로 파견되어 티벳불교를 연구한다. Irving Babbitt (1860-1933)는 Sanskrit와 Pali등 8개국을 구사한 동양학의 대가이며 Dhammapada를 번역했다. 20세기 초 유행한 New Humanism의 정수를 불교에서 가져오며, T. S Eliot같은 자를 제자를 통해 미국지성계에 동양정신의 자취를 남긴다.
불교 붐 시기에 일본문화와 일본불교가 연구되기 시작한다. 1854년 Perry제독에 의해 문호를 개방되고, 1869년 도쿠가와 막부를 이은 메이지 정부는 미국의 교육자 과학자에게 문을 열었다. 동경대학에 조개를 연구하기 위해 온 Edward S. Morse는 일본의 문화에 심취하여 도자기를 모으고, William Sturgis는 동양예술과 불교공부를 하고 책 Buddhism and Immorality를 펴낸다. Percival Lowell은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유교, 도교 보다는, 영혼에 대해서 얘기하는 불교가 기독교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중국, 한국, 일본은 동일하며 無我를 추구하는 사회로 본다. 동경대학 철학과 교수로 간 Ernest Fenollosa 자신의 긴 철학적으로 여정의 끝으로 천태종으로 귀착하고, 죽어서는 화장되어 절에 모셔진다. 그는 동양의 無我의 저변에는 강하고 신선한 我가 있음을 주장한다. 불교의 철학적인 면에 매료된 Lufcadio Hearn에게는 진정한 불교는 기복의 대상이 아닌 깊은 사유와 철학적인 것으로 “higher Buddhism”이라 불렀다. 그는 또 불교의 목적인 Nirvana가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는 염세적인 해석보다는 영혼의 해방의 의미로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이렇듯 불교가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닌 여러 종류의 불교가 있다는 것도 알아가며, 불교에 대한 이해가 차츰 깊어지게 된다.
불교 붐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1893년 콜럼버스의 미국대륙발견 400주년 기념으로 열린 시카코 세계박람회(World Columbian Exposition)는, 시대의 새로운 God으로 떠오른 과학의 대축제였다. 2100만 명이 새로이 발명된 전기불과 거대한 기계들에 대한 경외와 숭배의 맘으로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한 귀퉁이에서 World's Parliament of Religions이라는 모임 개회되었다. 이것은 세기의 진기한 풍경이었다. 9월 11일에서 27일까지 열린 이 모임에 4000명이 참석하게 된다. 한두교, 유고, 일본 신도, 인도불교, 일본불교대표들이 참석한다. 여기서 동양의 종교인들은 색색의 옷을 입고 참가한다. Swami Vivekandna같은 동양인은 서양인들이 동양 종교에 대한 이해가 선교사를 통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인들은 힌두교의 철학적인 높음, 불교의 보편성과 과학성 등에 깊은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인도에 종교적 가르침을 주려고 선교사를 보낸 자신들에게 “우리의 반풍수같은 선교사들을 보내서 이런 대학자들을 교육시키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깨닫자”고 얘기한다.
그러나 대부분 미국인들은 이런 행사가 일어났는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종교의 문제에 대해 자유로운 입장을 취하는 소수의 종교가와 지성인들은 자신들은 당시 자신들이 추구하는 보편종교(universal religion)에 맞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고, 기독교만이 진짜라는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성실히 진리를 찾으려는 면에서 모든 종교는 같다고 생각하며, 선교활동에 대해 비난을 하고, 기독교 God만 믿는 그리고 기독교에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에게도 비난의 화살을 퍼 부었다.
VI. 맺는 말
그 이후, 미국의 불교 포교가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한 Daizetz T. Suzuki같은 일본인이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禪불교를 전파하지만, 그렇게 대중적인 인기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 태평양 연안지역에 禪이 조금 활발해 졌고, 일본, 중국 같은 동양 이민사회에서 불교가 명맥을 이어가고, 1960년대 티벳 같은 곳에서 소수 동양 종교지도자들이 선교를 했지만 불교 붐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에서 불교가 늦게 알려지게 되는 이유는 불교가 유럽에 늦게 알려졌기 때문이고, 19세기 유럽학자에 의존하는 미국은 더욱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불교가 유럽에 늦게 알려지는 것은, 영국이 인도에 갔을 때 불교는 이미 Sanskrit어를 사용하는 인도대륙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불교는 대승화되어 티벳, 중국, 한국, 일본으로 퍼져갔고 다양하게 발전된 상태이며, 소승은 남쪽 섬 Sri Lanka에 Pali어로 남아있었다는 점이다. 19세기 미국에 풍문에나마 들려오는 불교가 염세적인 종교라는 것은 네팔이나 티벳의 祈福적이고 주술적인 성격이 강한 대승불교에서 나온다고 보여진다. 만일 Thoreau가 접한 것이 연화경이 아니고, Dhammapada였다면, 그리고 Transcendentalist들이 추구한 신비한 경험이 불교에서도 정수를 이룬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리고 ‘인간본성’이란 단어가 만일 불교의 중심 단어였다는 알았다면 불교에 적극적인 호기심을 가졌을 것이다. 힌두교에서 볼 수 있는 大宇宙론은 없지만, 인간내부를 파헤치는 심리학적인 면이 힌두교 못지않은 흥미를 끌었을 것이다. Pali어가 해독되어 19세기 후반 Max Müller나 Thomas Rhys-Davids가 미국인들에게 불교를 알려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19세기 말 미국에서 왜 불교 붐이 일어나는가? 이것은 儀式을 강조하는, 즉 주술과 祈福 종교로서의 불교보다는 윤리적 도덕적 과학적인 면의 불교가, 당시의 시대적 환경과 결부된 결과이다. 기독교의 비과학성(부활, 처녀수태)과 비인간성(원죄설, 결정론 등 인간의 자유의지, 도덕의지를 부정하는 면)이 있어도, 이런 것을 수정하거나 복음주의를 강조함으로서, 기독교내에서도 충분히 종교적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를 거부하고 대안을 찾는 경우, Transcendentalist들에게는 힌두교가 선택되었다. 마찬가지로 19세기 후반은 농촌과 기독교가 쇠퇴하고 도시와 과학과 Darwinism이 세력을 더해가는 시절로, 일부의 종교인들 즉 Transcendentalist들의 후예와 주변 지성인들에게는 기독교는 독단적, 배타적, 비관용적, 비과학적, 비인간적으로 여전히 흡족한 답을 주지 못하는 종교였다. 불교는 이들에게 가장 적합한 대안이었다. 하지만 대중은 여전히 불교의 무신론적이며 儀式的인 부분을 거부하고 있었고, 이런 요소들이 제거되고 계급제도타파나 종교개혁이라는 미국문화의 특성을 강조한 The Light of Asia를 환영하게 되었다. 미국지성계가 협동하여 성공시킨 작품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불교는 종교 즉 믿음의 대상으로서 대중에 다가간 것이 아니라, 종교철학 즉 사색의 대상으로 미국 지성인들에게 다가간 것이다. 불교에 매혹된 자들은 미국의 지성인들이며 대중이 아니다. 반짝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Theosophy가 이것을 말해주며, 곧 이은 일본인 Suzuki의 대승불교이지만 지적인 종파인 禪이 미국 지성인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1950년대에서 이런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불교나 타종교를 수용하는 미국의 지성계의 태도를 일관성이 있게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19세기말에 미국에 소개되는 불교가 소승불교의 경험적, 통찰적, 개인의 구원이라는 요소가 먼저 미국에 상륙했다는 것은 다행이다. 대승의 주술적, 미신적인 면이 소개되었더라면 19세기 말에도 불교 붐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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