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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속의 불교와 불교의 미국화 (출처: http://cafe.daum.net/AdConversion/HCVf/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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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9.07.18 조회3,3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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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성인

미국 속의 불교와 불교의 미국화

                                                                                     
I. 또 하나의 서역승(西域僧)

우리 전래의 회색 가사를 입은, 파란 눈의 서양 승려가 서울의 어느 지하철 속에서 “예수를 믿으라”는 근본주의 복음 전도사와 종교논쟁을 벌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언뜻 그의 모습은 ‘마라난타’나 ‘묵호자’와 같은 서역(西域) 승려가 이곳에 다시 출현한 한국 불교사 유입의 첫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는 현각 스님의《만행: 하바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책에 나오는 장면이다.

이 책은 현각으로 알려진 미국의 한 불교도가 한국의 불교 승려가 되기까지 자신이 겪은 바를 적은 것이다. 한국의 지하철에서 그가 겪은 경험은 불교와 기독교가 새롭게 조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변화된 한국 사회에는 어느 구석도 외국 것과 외국인이 끼어들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세계화는 인류공동체를 위한 이념이거나 경제 정책상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과 결부된 현상으로 되어 있으므로, 한국불교의 일각에 외국 승려가 나타났다고 해서 큰 사건으로 생각될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는 사실은 상업주의적 관심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무엇보다 불교인으로 자처하고 있는 나는 이 책을 큰 관심을 갖고 읽었으며, 그의 출현은 그대로 넘겨 버릴 수도 없다. 실제로 필자는《만행》의 저자인 현각 스님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입장이기도 하다. 이 분의 속명은 Paul Munzen으로 그가 하바드 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서로 알기 시작했으며, 불교에 귀의한 후 이 분의 강연회, 설법회에 참석하여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필자는 현각 스님이 불승으로의 선업을 쌓아가기를 바랄뿐, 앞으로 나올 글에서 혹 스님의 이름을 거명하더라고 결코 개인적인 비평이거나 한 승려의 행태를 논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단지 일정한 유형(패턴) 속에서 우리에게 쉬운 예로 떠오르기 때문에 거론될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결론 부분에 이르면 이 분의 위상은 미국 불교의 패턴의 반영일 뿐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불교학에서 뿐 아니라 종교학적인 입장에서도 여러 모로 검토될 많은 이슈들을 지니고 있다. 가장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는 개종의 문제이다. 기독교는 개종을 말하고 있으나 불교는 어떤가. 개종이 아니라면 그의 종교적 변신을 무엇으로 이해할 것인가. 재래적인 혼합주의(syncretism), 교체주의(kathenotheism)로 규정할 것인지, 혹은 ‘칸막이주의’(compartmentalism)라고 부르는 다른 아시아 종교의 ‘동시 신앙’, 곧 유교?불교?신도?기독교를 동시에 믿는 것으로 고백할 지는 논의할 문제이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나에게 어떻게 가톨릭 신자에서 불교신자로, 그것도 수행자가 되었느냐고 묻는다. 이른바 ‘개종한 이유’를 궁금해 하는 것이다. 참 당혹스런 질문이다.”, “나는 불교로 개종했는가? 그런데 나는 여태까지 한 번도 내가 종교를 바꿨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내가 비록 한 번도 개종했다는 생각은 안했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는 나는 언제나 개종자일 것이다.”, “물론 기독교나 가톨릭이라는 하나의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나는 분명히 개종을 한 셈이다.”, “예수님은…당시 이스라엘 성직자들에게 ‘내침’이 아니라 ‘포용’의 삶과 정신을 증거하였다.” (《만행》, p. 146, p. 152)


그러나 아직 이 책에 대한 본격적인 어떤 서평도 한 번 접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어느 분야보다도 보수적이고 또 우리 전통과 연계되어 있어 좀처럼 세계적인 흐름을 감지하려는, 그래서 묶은 탈을 벗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불교계 전통에 묶여 간신히 ‘우리 것’이라는 재래적인 가치만을 주장하는 한국불교에 현각 스님이 출현하였고, 그의《만행: 하바드에서 화계사까지》은 서점가뿐만 아니라 각지의 불교모임과 강연회를 누비고 있다. 과연 그의 출현은 하나의 사건인가? 아니면 우발적인 한 독특한 승려의 만행 중의 하나일 뿐인가? 그리고 산중에 계신 우리 스님 네들이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다면, 이런 문제제기는 나의 단견적인 시선이 만든 공연한 상상의 장면일까?


이 글이 시도하는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미국에서의 불교의 정착화 과정 필자가 접한 미국불교 현황에 관한 종합적 소개는 버클리대학에서 연구 중이었던 진월스님의 보고서가 유일한 것이었다.(〈한국일보〉, 1997.11.14. 70년대 이후 미국 불교계 근황) 현지에서 승려로서 연구하며 겪은 사항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불교신행 단체들이 집중된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취집한 자료들이라서 생생한 현장을 잘 집어내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각기 다른 사항들, 곧 불교 신행자들과 불교학 연구 경향, 과거의 경향과 지금의 변모, 그리고 불교 신행 단체와 대학 중심의 연구소의 활동 상황《만행: 하바드에서 화계사까지》이 모두 같은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으며, 단순화된 소개에 그치는 감이 있다. 모든 것을 구분 없이 처리한 점이 강하게 느껴지고 “많이 있고”, “활동적”이라는 말과 동양의 전통이 서양의 이질적인 땅에서 꽃피고 있다는 현상만 너무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어, 미국 불교 자체가 지닌 문제점은 거의 제기되지 않고 있는 흠이 있다.


과 현장을 밝혀 보려고 하는데 있다. 그리고 미국 불교의 소개적인 과정에서 현각 스님의 출현은 미국에서 불교인이 되는 전형적인 한 범례가 된다는 것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서양에서 불교의 정착화를 통해 불교에 대한 연구가 새로운 방향을 지향한다는 점에 있다. 지난 번 종교학회에서 발표된 내용 이민용,〈서구 불교학 연구의 문화배경에 대한 성찰〉,《종교연구》, 제18집, 2000년에서 필자는 자칫 서구의 불교학 연구가 언어?역사?철학적인 학문만을 추구하는 전문인 위주의 ‘딜레탄티즘’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 제기를 하였다. 서구의 불교연구도 학계의 일반적 경향인 지적(知的) 엘리티시즘으로 빠졌으며 서구에서의 불교에 대한 지나친 학문적 접근을 자기 비판하면서 루이스 고메즈(Luis O. Gomez)는 이렇게 불교학 연구의 문화?사회적 컨텍스트를 평가한다. “불교학 연구는 비서구적 문화유산에 대한 서구적인 작업을 지속하고 있으며 비불교도인 청중을 위해 비불교적인 컨텍스트 속에서 일어나는 고도로 전문화된 사람들로 구성된 불교에 대한 논의이며, 이 고도의 지적작업은 주류의 서구 문화?예술?철학에서는 동떨어져 있으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종교 교설적인 성찰에서도 벗어나 있다.” Luis O. Gomez, “Unspoken Paradigms: Meanderings through the Metaphors of a Field”, Journal of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Buddhist Studies, 18-2
, 이제 불교학 연구는 그런 과거의 역사적 상황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종교연구는 그 종교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필수적 요건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거 불교연구는 이 상식을 뻔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회피해 왔다. 배경 없는 연구는 그 종교의 신학적 도그마만 만들어낼 뿐 살아 생동하는 실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중국불교가 중국 속에 이질적으로 존재했던 불교이기만 한 것이 아니듯, 서구의 불교 역시 서구 속에 이식된 종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땅에 뿌리내리고 있는, 서구화/미국화의 변모를 겪는 불교(westernized/americanized buddhism)인 것이다.

 

현각스님의 출현과 이러한 불교학의 새 방향 전환은 서로 맞물려 있으며, 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드러나는 두 측면일 수가 있다. 미주에서의 서양승려의 출현은 불교를 학문만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에 참여한 사람들-불교 수행자이거나 불교에 대한 학문적인 추구를 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확대하고 있으며, 가치를 바꾸는 ‘수행적 기능’(performative function)을 하고 있다. 뤼그(Sefort Ruegg)가 관찰하듯 불교는 철학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종교이기도 하고, 또 철학이자 종교(Philosophy and Religion)이며, 무엇보다 삶의 한 방식(a way of life)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뤼그(Seyfort Ruegg)는 중론 사상연구의 대가로 지난 번 세계불교학회장(International Association of Buddhist Studies)을 역임했다. 그의 임기 중 그는 서구 불교학 연구에 대한 방법론을 문제시하며 서구 불교학 연구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제기하여 학회의 한 과제로 삼았다. 그때 그는〈불교학 연구에 있어서 철학의 위치에 대한 성찰〉(“Some Reflections on the Place of Philosophy in the Study of Buddhism”, JIABS, Vol. 18, No. 2. winter 1995) 이란 논문을 발표했으며, 위의 인용된 말은 같은 맥락의 회장 취임 연설 〈불교학 연구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관건〉(“Some Questions on the Present and Future of Buddhist Studies”, JIABS, Vol. 15, No. 1)에서 발표한 것이다.


‘삶’에 연루된 여러 사항들, 사회?경제?정치?문화의 각 방면에서 불교가 조명되고 불교를 통해 이런 사항들이 수행적으로 다시 삶의 내용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제껏 고전적 상식으로 생각했던 서양의 문물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대신, 우리의 정신성, 곧 불교 같은 종교가 그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외관상 그런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불교를 전달해 주고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견이다. 서구(미국)는 그 나름대로 불교를 소화하고 있다. 숫자로 미국불교의 현황을 개관해 보아도 미주에서의 불교정착의 양적 확대를 실감할 수 있다. 예컨대, 돈 모레알(Don Morreale)의 1989년판《미국 불교도》(Buddhist America)에서, 불교계의 종합 쎈터(centers), 운둔(Retreats), 수행(Practices) 장소에 대한 350쪽에 달하는 명단을 싣고 있다. 미국 NBC 방송의 피터 제닝스(Peter Jennings)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불교신자 인구를 400만에서 600만으로 추산하고 있다.


학문적인 차원의 불교학 연구가 동양에서 시원된 것이 아니었듯이 이제 수행적 기능을 지닌 불교는 ‘불교 신학’(Buddhist Theology)을 주창하고 있다. 불교신학(Buddhist Theology)이란 신조어를 창안하여 불교학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대변하려는 모임이 1996년 ‘미국종교학회(American Academy of Religion)’ 연례회의에서 결성되었다. 객관적?기술적?언어학적 연구 대상으로서의 불교학 연구는 여러 측면에서 그 한계를 느끼게 되었으며, 살아 움직이는 종교현장을 정신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점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불교연구자의 입장이 항상 객관적이어야만 하는가 라는 점에 대한 폭넓은 자기반성이 일어났고, 그 점은 상대적으로 기독교 신학과 대비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를 연구하는 학자는 자신이 기독교 신자이고, 그 종교성에 공감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불교에 대해서는 그 종교성에 공감하는 입장을 공개리에 표명하지 않는 이상한 형태의 서구 불교학자들을 만들었다. 곧 암묵리에 자신을 불교신자로 자인하거나 혹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경우들이다. 공개적으로 불교의 종교성에 공감하는 학자들이 증가하면서 이 불교신학은 기독교신학과 동등한 선상의 학문영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이 불교신학을 제창하며 그에 관한 여러 측면의 논란과 평가를 실은 논문집이 출간되어 있다. (Roger Jackson & John Makransky ed., Buddhist Theology: Critical Reflections by Contemporary Buddhist, Sunny, England: Curzon Press, 2000) 이밖에 불교신학이란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으나, 동일한 맥락의 불교학 연구의 종교성이란 무엇이냐(What is religious about the study of Buddhism?)는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엑켈(D. Eckel)의 논문도 참조하기 바란다. David M. Eckel, “The Ghost at the Table: On the Study of Buddhism and the Study of Religion”,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LXII/4. 또한 다음 논문 역시 불교학 연구의 문제점을 폭넓게 다루고 있어 참고의 대상이 된다. Jose Ignacio Cabezon, “Buddhist Studies as a Discipline and the Role of Theory”, Journal of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Buddhist Studies, 18-2.
불교 신학의 제안은 이러한 미국화된 불교 풍토에서 ‘새로운 불교’로서 이제껏 진행되어온 불교연구, 불교실천과는 다른 확대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구적인 의상을 입고 서구적 특징을 현양시키는 불교가 아니고 그 보편성을 표방하며 새 시대의 불교로 거듭나기를 주장하는 것이다.
현각 스님의 돌출은 우리 불교의 자랑, 우리 불교의 확대로 생각할 수 없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의 불교적인 시각과 경험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었느냐를 보여 줄 뿐이다. 그의 등장은 결코 우발적인 사건도 아니고, 한 서양스님의 정신적 고뇌를 자전적으로 표현한 에피소드도 아니다. 새로운 불교가 미국 혹은 서양 땅에서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그 여파가 현각 스님이란 또 하나의 이 시대의 서역승(西域僧)을 우리에게 파견한 것이기 때문이다.


II. 불교는 믿을 만한가

왜 서양 사람들은 불교를 믿기 시작하였는가? 불교는 서구 종교 전통과는 조금도 일치점을 찾을 수 없어 그 출발부터 확연히 구분될 수밖에 없는 종교다. 이제 서양화된 불교(Westernized Buddhism)가 되었건, 서양 사람들이 믿기 시작한 불교(Western Buddhist)가 되었건, 지금 왜 그들은 불교로 돌아서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불교의 어떤 면을 추출해 보아도 그 가운데 어떤 공통된 요소도 찾을 수 없는 것이 서양인들의 신앙 내용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자이건, 복음주의 신앙자이건, 정통 유대인이건, 가톨릭 주류이건, 몰몬교도이건, 심지어 무슬림이라 할지라도 불교와 비교해 볼 때, 그들의 신앙내용은 불교와는 다를 수밖에 없는 서양의 종교들이다. 오히려 그들 상호간의 유사성과 친근성이 강하면 강했지 불교와는 거리가 멀며, 불교는 이 종교들과의 공통된 뿌리를 거의 갖고 있지 않다. 또 그 성전(聖典)들의 어떤 부분과도 공유하고 있지 않으며, 한 걸음 나아가 창조주인 신(神)에 대한 생각에 이르러서는 불교가 이 종교들과 얼마나 다르냐 하는 것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수행체계에 관해서만 말하더라도, 이 종교들에서는 제한된 범위에서의 영적 수련이 허용될 뿐이다. 그에 비해 불교는 그 자체가 단계적인 수행체계라 할 만큼 불교교설의 대부분이 수행체계 그 자체를 말하고 있으며, 오랜 전통을 통해 그것을 발전시켜 오고 있다. 이러한 차이를 지니고 있는 서구인들이 불교를 믿는다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면서까지 서구인들이 불교를 믿고 있는 사실은 과연 어떤 이유에서 일까?


물론 ‘이것이다’ 라고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나열한다고 정답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종교사회학자들은 분석적으로 크게 미국사회의 세속화에 따른 탈기독교화, 사회구성의 다변화에 따른 종교의 다원화, 자본주의적 시장 원리에 따른 선택의 용이성 등의 이유를 들고 있다. 피터 버거는 그의 저서《성스러운 천개》(Sacred Canopy)에서 이 점을 4가지로 분석한다. ①세속화로 인해 전통종교의 전횡성이 해체되기 시작했고(demonopolization), ② 이 전횡성의 해체로 그 신도층의 충성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고, ③ 다원주의적 상황으로 몰아갔다. ④ 다원적인 상황은 시장원리에 의해 유도되어 이제 더 어쩔 수 없는 시장적 선택상황이 종교의 현장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피터 버거가 미국의 종교의 다원화를 그렇게 평가했다면 로버트 벨라(Robert Bella)는 보다 우리에게 직접적인 답변을 하고 있다. 곧 그는 “여러 면에서 아시아의 정신성은 거부된 공리적 개인주의(rejected utilitarian individualism)에 관한 성서적인 종교(Biblical Religion)보다 훨씬 더 전면적으로 대조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외적 성취보다는 내적 체험을 보여주고, 자연에 대한 자원착취에 대하여는 자연과의 조화를 보여주고, 비인격적인 조직(기구)에 대하여는 한 스승(Guru)에 대한 긴밀한 관계를 보여준다.”고 불교를 위시한 동양의 정신성에 대한 서구인의 경도를 그렇게 평가한다. 특히 유대인이 왜 불교에 관심을 갖는가하는 문제의 일단으로 바로 자신을 예로 든 로저 카메네츠(Rodger Kamenetz)는 인종적 복합성 속에서 (불교는) 개인주의 혹 개인 개체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이끌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결론적인 답변들보다는 이 현상을 여러 면으로 조명해 본다면 보다 넓고 깊은 이해와 더불어 나름대로의 답변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라는 질문에 앞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바꿔 볼 수도 있다. 누가 불교신자인가?


III. 누가 불교 신자인가

서양에서 누구를 불교신자라 부르고, 누구를 불교신자가 아니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인가? 일견 모순되고 우스꽝스러운 질문이 될 것 같다. 절에 나가고 적당한 불교적 수행을 하면 불교신자이며, 반대로 기독교 신자이거나 다른 종교의 신자라고 표명하면 당연히 불교신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 논리를 펴는 이 우스꽝스런 질문과 상식을 넘어서서,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 서양에서의 불교신자 문제이다. 한마디로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불교신자가 된다. 유태인이면서도 불교신자로 고백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전형적인 유태교 신자이며 심리학자인 실비아 부어스틴(Sylvia Boorstein)은 유태교와 불교에 몸담고 있는 자신의 체험적 종교론을 썼다. 유대교이거나 기독교라는 서양 전통에 자신의 종교정체성을 두면서 불교를 믿고 수행하는 형태를 기술하는 것이다. 한 사람 속에서 서양의 종교 전통과 불교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서양적 기준으로 볼 때 이상한 현상을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책 제목 자체가《이상한 데?, 당신은 불교신자 같이 보이지 않아!》(It's Funny. You Don't Look Buddhist)이다.


그러나 이들은 일정한 불교단체에 소속되지 않으면서도 불교수행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정기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불교인이면 누구나 수지(受持)하는 오계(五戒)를 받고도 불교신자로 간주되지 않을 수 있다. 이들에게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 불음주(不飮酒)라는 실천 수행 덕목이 반드시 불교신자가 되기 위한 최종적 준수항목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종적이기 보다 불교수행의 단초를 여는 사항이며, 그 덕목들은 일상생활에 실익이 되는 심신건강을 위한 지극히 상식적인 사항일 뿐, 그것들을 실천하기로 서약한다는 일이 반드시 불교신자가 되는 필요조건이 아닐 수 있다. 정규적인 참선수행에 참여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역시 모든 불교신자가 참선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조건이 아니듯이 참선명상에 참가하였다 하더라고 자기 자신을 불교신자라고 자처하지 않는 서양 사람들이 많다. 소위 ‘아직은-아닌-불교신자’(Not-just-Buddhist)들이다.
이런 예를 들어 볼 수 있다. 촉망받는 직종인 월(Wall) 가의 주식시장에서 근무하는 30대 초반의 한 직업여성이 퇴근한 후 곧바로 맨하탄 상단(업타운 맨하탄, 뉴욕의 상류층이 거주하는 지역)의 자신의 콘도 아파트로 들어선다. 샤워를 한 후 편한 옷을 갈아입고 침실과 연결된 내밀한 작은 방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불단(佛壇)이 설치되어있다. 혹은 하얀 벽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반드시 쿠션 좋은 방석이 놓여 있어야만 한다. 그녀는 그곳에서 30분 내지 1시간가량 참선을 하고 나서 부엌으로 들어가 간단한 건강식 저녁을 마련한다. 아니면 인근의 동양인이 경영하는 깔끔한 식료품상에서 미리 조리가 잘된 채식식단을 골라 사들고 올 수도 있다. 저녁 식사 후 그녀는 TV의 저녁 뉴스를 보거나 아니면 전날 읽다 남긴 달라이 라마의 책이거나 틱낫한의 수행서를 펴들고 흡족한 상태에서

독서 속으로 빠져든다.
위의 가설적인 이야기는 불교 참선 수행을 일상의 행사의 하나로 받아드리고 있는 어느 불교 수행자를 전형화 시킨 이야기이다. 세부적인 사항의 차이, 여자가 남자로 바뀔 수도 있고, 직장이 주식가에서 컴퓨터회사 중역으로 바뀔 수도 있으며, 뉴욕이 샌프란시스코나 보스톤의 하이테크 지역으로 변경될 수 있을 뿐, 기본틀은 그대로 이다. 한결같이 그들은 자기 자신을 불교인이라고 못 박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입장을 편히 ‘아직은-아닌-불교신자’(Not-just-Buddhist)으로 자처하지만 불교 동조자(sympathizer)인 것은 분명하다. 불교 전문 잡지인《삼륜(三輪)》(Tricycle: The Buddhist Review) 삼륜(三輪)은 불(佛)?법(法)?승(僧)을 말함.


의 정기 구독자 6만명 가운데 절반은 자신을 불교 신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편집자인 헬렌 퉈르코브(Helen Tworkov)는 추산한다. 또 불교 단체에 평균 9년 반 이상을 관계한 사람 가운데 1/3이 아직도 자신을 불교신자로 정체성을 밝히고 있지 않다. 오계를 받았으며 참선수행을 정기적으로 실천하고 있으며, 이미 일정한 불교 단체를 9년 반이나 관계한 사람이 불교신자가 아니라고 하면 그는 과연 어떤 종교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일까?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찰이 존재하며, 그 사찰 행사에 정기적으로 집안 선대부터 참여 하였으며, 절에 가서 집안 제사 의례를 집행하거나, 혹은 같은 불교인끼리 여러 모임에 참여하는 한국과 달리, 동류의식이 강한 현장이 결여된 미국의 불교계는 단선적인 불교인 분류가 힘들다. 기성적인 무슨 교 신자라는 단정은 어떤 규정을 적용시키는가에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얀 내티에(Jan Nattier) 같은 불교학자는 미국 불교를 규정할 때 따를 수 있는 불교신자 규정의 애매모호성을 지적한다. 곧 그는

미국 불교란 무엇이냐? 최근에 유럽계 미국인(European-American)으로 불교에 귀의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냐 혹은 아시아계 미국인(Asian-American)을 선조로 하는 불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냐 아니면 일정한 이념에 공감하는 사람이냐 혹은 어떤 실천에 관여하는 사람이냐? 그것은 참선하는 일이냐, 기도(불공) 드리는 일이냐 혹은 두 가지를 동시에 수행하는 일이냐 혹은 자유로운 참여인(free-lancer)들도 포함될 수 있는 것이냐? Jan Nattier, “Visible, Invisible”, Tricycle: The Buddhist review, Vol. 5, No 1, 1995, pp. 42-49.


라고 불교인의 정체성을 묻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이 종교학이나 불교학의 학문적 명료성을 위한 이슈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혼재되어 있는 불교적 성향 가운데 순수한 의미의 진정한(genuine) 불교인이 무엇일까 하는 현실적인 물음에서이다. 그리고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대표시키는 범주의 정치성’(politics of representation)까지도 개재될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Ibid.

정체성의 문제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단순화시켜 분류시킬 수 있는 정체성이 있으면 좋겠지만 실제의 사실과 현장은 학문적 단순화 작업이나 혹은 개념화 작업과는 큰 거리에 있어 현실의 다양성을 반영시키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더욱이 사회학의 조사 과정이나, 각 종교단체, 언론 단체의 숫자불리기 식의 조사에 의해 신도수가 국민 총인구수를 넘어서는 단계에 이르면 대표성의 정치성(politics of representation)의 극단적인 예를 보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불교적인 행사/행위들과 관계된 현장에서 미국불교에서 누구를 불교신자라 할 수 있으며 불교신자는 무엇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IV. 불교신자의 유형

어떤 면 위에서 제기된 질문은 전혀 이질적인 풍토의 서양에서 뿌리 내리고 있는 불교를 우발적인 사건으로 주변화 시키기 위해 던지는 질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확고한 틀과 명확한 경계선을 지니고 있는 종교단체에 대해서도 동일한 질문을 제기한다면 과연 자신의 무엇을 두고 그 종교의 신자라고 자기 정체성을 밝힐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미국에서의 불교신자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결코 주변화 된 소수종교인 불교에 대한 질문만이 아니고 종교인의 구성요건을 밝히는 일단이 되기도 한다.
과연 무엇을 두고 불교신자라 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불교학자나 조사자들은 각기 달리 처해 있는 현장이나 보는 시각에 따른 다양한 범례들을 예시하고 있다. 제임스 콜만(James William Coleman) 같은 사람은 ‘책방 불교도’(Bookstore Buddhist) James W. Coleman, The New Buddhism : The Western Transformation of an Ancient Tradition, Oxford Univ. Press, 2001. p. 186-.
란 새로운 미국적 불교신자 범주를 설정하고 있다. 어떤 불교 단체에도 관여하지 않고 단지 불교수행과 신앙에 대한 인기 있는 책을 읽고 불교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지칭한다. 실제로 이 범주에 들어가는 숫자는 미국 불교인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불교관계 책을 접하는 경로는 다양하겠지만 우선 대학의 교양강좌를 통해 동양 전통의 하나인 불교 관계 텍스트를 읽게 된다.


전형적인 것 중의 한 가지는 버지니아 대학 교양 프로그램 속의 필독서에는 헤르만 헤세의《싯달타》가 들어 있다. 부처님 생애의 청순성과 그 지고한 정신적 모습을 읽은 학생은 일단 불교에 노출되고 관심을 갖게 된다.《싯달타》뿐 아니라 불교서적?명상 서적은 이제 일반서적상의 중요한 독립된 코너를 차지한다. 토마스 트위드(Thomas Tweed) 같은 종교학자는 선(禪, Zen) 관계 타이틀을 지닌 서적 197권을 조사, 나열하고 있다.《선과 오토바이 타기》,《선과 골프치기》,《선과 활쏘기》,《선과 담배 끊기》,《선과 컴퓨터 프로그램》, 《선과 아기기저귀 갈기》등등이다. 한 조사자는 할리우드에 있는 불교전문서적상인 보리수(Bodhi Tree) 책방에는 자그마치 1900여종의 불교 타이틀 책을 갖추고 있다고 보고한다. 물론 진지한 불교수행자들에게 이 많은 책들이 일종의 호사주의에서 오거나 장난기 심한 ‘신세대’의 유행을 따른 책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의 유행이란 그렇게 간단한 것으로 도외시 할 수만은 없는 사회현상 중의 하나이며 생활의 한 부분이 된다. 대중사회란 간단치 않고 또 손쉽고, 빠른 통신, 대중적인 문헌의 범람 속에서 특권화 된 승려를 통해 불교를 접하기보다 이런 서적의 활용이 더 용이하고 폭넓은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 서구불교와 책은 그 발단부터 깊은 관계에 있었다. 서구불교학의 발단을 연 것이 불교 문헌에서 시작되었고 빅토리아조의 불교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인 환상은 계속 많은 책을 쏟아내었다. Ibid. p. 188

그 가운데 에드윈 아놀드(Edwin Arnold)의《아시아의 빛》(The Light of Asia, 1879)이란 시집은 100만부가 팔렸고, 이직도 계속 재판이 나오고 있다. D. T. 스즈끼의 다양한 선서(禪書)들, 그리고 최근의 달라이 라마와 틱낫한 월남스님의 명상서들은 뉴욕타임즈 10선 중에 자주 오른다. 이미 책을 통한 불교이해는 미국의 실질적인 불교접촉의 큰 통로가 아닐 수 없게 되었다. 아마도 이런 현상은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일반화되고 있는 현상일 듯싶다. ‘책방 불교’는 곧장 새 시대의 대중매체인 컴퓨터 웹사이트에 접속되어, ‘사이버 상가(Cyber Sangha)’와 연결된다. 사부 대중의 상가(승단: Sangha)는 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컴퓨터 웹사이트에도 존재하게 되어, 거기에서 사부대중이 동시에 만날 수 있다.


불교논리학에 대한 학술서 뿐만 아니라 불교 수필집을 내고 있는 리차드 헤이즈(Richard Hayes) 같은 학자는 스스로를 불교신자를 표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불교를 말하고 실천수행을 한다. 그리고 이메일의 온라인 토론그룹을 만들어 ‘Buddha-L’의 웹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프레비쉬(Charles Prebish)는 ‘사이버 상가Cyber Sangha’를 실제적인 또 하나의 승단으로 규정하며, 독립된 전혀 다른 승가로 여긴다. Gary Ray에 의해 1991년 신조어로 ‘Cyber Sangha’를 창안한 후 온라인상의 불교공동체를 설립 BodhiNet Bylaws를 세운다. 이것을 효시로, 승가는 종파와 지역 등 모든 차이점을 극복한 말 그대로의 화합승(和合僧)을 사이버 상에 창안하여 가장 현대적인 문명의 이기를 가장 이상적 불교 이념을 구현하는 도구로 삼는다. 이후 각종 토론 그룹과 데이터베이스, 전자 신문들을 인터넷 선상에 설치하여 불교인 상호간의 통신매체의 역할을 시키는 것이다. 다음 책의 ‘Cyber Sangha’장을 참조하라. 이 책에는 모든 인터넷 상의 웹사이트와 접근 주소가 올려져 있다. 특히 203-232쪽을 참조할 것. Charles Prebish, Luminous Passage: The Pratice and Study of Buddhism in America, Univ. of Calif. Press, 1999.
웹 사이트에 나오는 불교관계 정보는 이제 각종 불교토론 그룹을 위시하여 방대한 양의 불교 고전문헌까지 제공하고 있다. 원하는 사람에 따라 한문 대장경으로부터 산스크리트, 티벳 대장경 등 감히 일반으로는 접근이 불가능 했던 모든 성전들이 그대로 인터넷에 노출되어 있다. 또 「시청각 불교도」도 가능해 진다. 이들은 불교 ‘테이프’나 ‘비디오 카세트’를 통해 불교와 접하는 것이다. ‘책방’이란 고전적인 표현으로 대중매체를 대표시켰지만 결국 현대의 통신 매체의 거의 모든 분야에 불교가 개방되어 있는 셈이다. 이 ‘책방불교’는 외형적인 불교전달의 모습을 표현한 말이지만 그 책을 읽는 행위와 연관시켜 토마스 트위드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어휘를 등장시켜 불교에 공감하는 동조자들을 표현하고 있다. ‘침실 조명등 밑의 불교도’(Night-Stand Buddhist)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소위 엘리트 불교의 구성원을 소개한다. Thomas A. Tweed, “Night-Stand-Buddhists and Other Creatures, Sympathizers, Adherents, and the Study of Religion”, American Buddhism: Method and Findings in Recent Scholarship, ed. by Duncan Williams and Christopher Queen, Richmond, U. K.: Curzon Press, 1991, pp. 71-90.


우리는 수많은 ‘침실조명등 밑의 불교도’가 존재함을 기억해 두어야 할 듯싶다. 비록 실천 수행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지는 못했어도 카필로(Philip Kapileau)의《선의 세 개의 기둥》에 나오는 예를 모방하며, 두 겹으로 접은 베개 위에 올라 앉아 자신의 침실 한쪽 벽을 묵묵히 쳐다보면서 불교에로 서서히 경도되는 사람들을 말이다.

잠자기 전 어느 선(禪) 소개 책자를 침실 조명등 밑에서 읽고 수면에 들어가는 경우와 앞서 언급한 책방 속의 불교도는 서로 겹치기도 할 것이다. 일화가 어느 경우에 해당되건 전통적인 개념에 묶인 불교신자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이런 다양한 형태의 불교 동조자들을 일괄적으로 포용할 것인지, 아니면 일정한 틀을 설정하여 배제할 것이냐 하는 것은 궁극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이 어느 종교의 신자이냐 할 때 제기될 수밖에 없는 종교적 정체성의 문제는 특히 미국 불교신자의 이러한 다양한 행태를 마주칠 때 미국불교의 종교적 다면성과 혼유성을 보게 된다. ‘알로하-아미고’(Aloha는 하와이 원주민의 ‘안녕’이란 인사말이고, Amigo는 스페인어의 ‘친구’라는 말)란 말을 창안하여 미국의 지역적 다양성과 다민족성을 드러내듯이 미국의 새로운 불교도 이제 ‘불교적 알로하-아미고’란 새로운 말을 재생산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우선 선대에서 재래적으로 물려받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나 그 2세들의 불교신자를 기독교의 예를 따라 ‘요람불교신자’(Craddle Buddhist)라 부른다면 전혀 다른 종교 전통에 속해 있다가 불교로 전향한 사람들을 ‘개종 불교신자(convert Buddhist)’라 부를 수 있다. 이 말 역시 다분히 기독교적 개념이 내포된 어휘로 개종의 개념이 없는 불교로서는 적합할 수 있느냐 하는 표현상의 이질감을 준다. 아마 서양 불교신자는 이전에 다른 종교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대다수가 이 범주에 속할 것으로 생각되나 실제로 개종자로 부르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만행》의 저자 현각은 그의 책의 어느 한 부분에서도 ‘개종했다’라는 말을 쓰고 있지 않으며, 아직도 그의 부모는 현각을 가톨릭교도라고 믿고 있다. 현각 자신도 이런 지적을 부정하고 있지 않다. 앞서 인용한 부어스틴(Sylvia Boorstein)의 책에서도 자신을 유대교와 불교의 동조자 내지는 두 종교에 동시에 정체성을 두고 있으며, 불교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양에서는 이러한 두 종교의 상호 공유성이 이상하게 보이고 그것을 혼합주의(syncretism), 교체주의(kathenotheism) 등의 여러 형태로 표현하여 기독교 중심의 개념을 충족시키고 있다. 그리고 한국?일본 등 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한 개인이 유교인이자 불교인 또는 신도(神道) 신자임을 일종의 ‘칸막이주의’(compartmentalism) 신앙으로 표현해 보기도 한다. 철저한 서양적인 관점의 분석이며 결국 아시아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의 결과가 ‘칸막이주의’로 찢어지고 있다. 결국 트위드는 자신의 글의 서두를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아시아 종교의 혼유성을 표현한다.

곧 한 미국 주교가 혼란에 빠져 나에게 자신의 교구에 참석하는 월남인들은 “실제로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Not really Catholic)”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 주장을 듣고 나도 혼란스러웠다. 이 월남인들이 자기 모국에서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라도 있다는 것일까? “그들은 아직도 불교도들입니다.”라고 주교는 설명했다. 이 주교는 월남가톨릭인들 사이에 불교의 영향이 크고 그들이 1975년 사이공 몰락과 함께 미국으로 탈출했을 때 이 혼성적인 전통(hybrid Tradition)을 그대로 끌고 왔다고 말했다. Thomas A. Tweed, “Who is a Buddhist? Night-Stand Buddhists and Other Creature”, Westward Dharma: Buddhism beyond Asia, ed. by Charles Prebish and Martin Baumann, London, England: Univ. of California Press, 2002, pp. 17-33.


월남 가톨릭교 신도와 불교 참선 수행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라고 트위드는 묻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종교적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곧 누가 가톨릭교도이며 누가 불교도인가, 아니면 우리는 한 종교에 관심을 두고 있으나 그 종교에 일치되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고 질문을 제기한다. 특히 그는 개종자의 경우 그의 과거의 종교 전통, 그것은 흔히 문화?사회와 함께 표리를 이루는 것인데 그것을 손쉽게 떨치고 새로운 종교가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개종의 경우 종교성은 더 복합적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공식적인 불교인(Nominal Buddhist)에 상대되는 실질적인 불교인으로 자작(自作)의 불교인(Self-styled Buddhist)도 가능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불교인과 이 자작의 불교인 사이에 아마 우리가 앞서 예시한 ‘책방 불교인’과 ‘침실 조명등 불교인’이 들어 갈 터이고 그 밖에도 스스로 나름대로 규정하는 불교인들이 모두 도매금으로 이 부류에 속할 것 같다. 예컨대, 유대-불교인이라고 자처하지만 ‘불교인 같지 않은’ 부어스틴도 이 범주에 귀속될 터이다. 이 속에는 ‘마굿간 불교인’(Horse-shed Buddhist)도 들어간다. 열성적으로 매번 모임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일년에 몇 차례 심심풀이 식으로 명상과 법회에 참석하는 사람, 그리고 이와 비슷한 형태의 불교 동조자로 열성적이지 않고 적당히 미지근한 사람인 ‘미온적인 불교인’(Lukewarm Buddhist)이 존재한다. 스승이나 승려들이 지시하는 것만큼 충성스럽게 수련에 참가하지는 않으나 경우에 따라 다른 사람보다는 더 열심인 불교신자들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사람들은 ‘구매자 불교도’(Shopper Buddhist)라 볼 수도 있다. 불교라는 대상물을 놓고 그것이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 어떻게 소용이 되는 것인지 끊임없이 평가해 보며 품목을 고르는 입장에 서있는 불교 흥미론자들을 지칭한다. 이 구매자 불교와 유사한 입장으로 ‘법(Dharma, 法) 메뚜기’ 불교신자도 등장한다. ‘법 메뚜기’(Dharma-hopper)로 지칭되는 부류로 한 그룹의 참선수도회에서 다른 형태의 명상 그룹으로 뛰어 다니는 사람을 일컫는다. 따라서 일정한 불교조직이나 어떤 신앙형태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섭렵하며 찾아다닌다고 하여 ‘탐색자 불교인’(Seeker Buddhist)이라는 명칭을 갖기도 한다. 이 밖에도 다른 흥미로운 용어들이 등장하고 있으나 새로운 풍토에서 발생하는 형태들을 멋대로 붙여 보는 명칭들이라 생각되어 너무 경솔한 호칭이 아니겠느냐 하는 우려마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개념화된 서구 전통의 종교 명칭을 편법으로 차용하는 격의적(格義的) 적용보다는 이 잠정적 표현이 현실과 현장을 재현시키고 있어 오히려 유익할 수도 있다.


다면불(多面佛)처럼 보는 모습에 따라 여러 형태의 표현이 가능한 이 이상한 형태의 불교인들을 어떻게 묶어 볼 수 있을 것인가? 간단히 불교인의 부류를 추종자와 동조자 그룹으로 나누어 본다. 그러나 추종자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종교적 전력(前歷)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의 성격을 일관되게 묶을 수도 없다.
그리고 동조자 불교도는 앞서 언급했듯이 다기 다양하여 묶는다는 작업이 오히려 사태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묶어줌으로써 특징이 살아나고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관점이 살아나야 하는데 전혀 그럴만한 특징이 부각되지 않는 고충이 따른다. 가장 관건적인 문제는 앞서 제기한 “어떤 사람들을, 어떤 특징, 어떤 수행, 어떤 이념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두고 불교신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결국 미국에서의 불교의 성격을 규정짓는 가장 어려운 문제가 이 점이기 때문이다.
미국 속의 불교 혹은 미국화된 불교를 다루고 있는 적지 않은 수의 저술, 논문들의 핵심 부분마저 이 점에 집중되고 있으며, 이 질문을 두고 많은 논란을 펼치고 있다. 미국 불교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는 점이 바로 누가 불교도인가 하는 문제이다. 얀 내티에는 ‘누구를 두고 불교도라 할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그 어려움을 이렇게 적고 있다. “미국 불교를 연구하는 첫 부분에서 마주치게 되는 문제의 하나는 ‘불교도’란 범주 속에 누구를 정확히 포함시켜야 하는 점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불교도라고만 하면 충분한가, 어떤 믿음, 어떤 의례적인 실천(참선이거나 독송), 혹은 특정한 조직 단체의 활동적인 회원이 되는 것이 요청되지는 않는가. 아마 이런 질문들은 어떤 종교 전통을 연구하더라도 제기되는 질문일지 모르나, 일정한 지역에서 새로 형성되고 있는 소규모의 종교의 경우에는 특히나 심각한 질문이 제기되는데 극소수의 사람이 이 종교에 일차적인 접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 특별한 예를 하나 들자: 어느 대학 초년생이 알랜 왓츠(Alan Watts)가 쓴 선(Zen, 禪)에 대한 책을 한 권 사서 읽었다고 하자. 그는 이 책을 좋아하게 되었고 결국은 자기 자신을 하나의 불교도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인쇄된 종이를 넘어선 불교의 어떤 구체적 형태와도 일찍이 접촉해 보지 않았다. 그를 북미주에서 불교에 대해 연구하는 범위에 포함시켜야 할 것인가?”


이 민용 글/ 2004년 4월호 미주현대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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