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화 5호] 인터뷰: 캐나다 대각사 주지 & 캐나다 승가회장 양일스님 해외포교, "목숨 바쳐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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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배수민 작성일2011.07.14 조회3,252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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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납 78세. 미국과 캐나다를 통틀어 노장중의 노장이다. 캐나다의 불교를 대표하며 사자후하던 시절을 뒤로 하고 지금은 모든 일을 정리중이시란다. 낯선 땅에서 맨손으로 일군 해외포교 삼십년의 경륜과 심경을 전하는 목소리는 그러나 여전히 생생하고 박력있었다.
세계일화: 캐나다에 진출하시게 된 동기가 있었는지요?
양일스님: 볼티모어에서 불자들의 초청이 있었는데 통도사 월하스님께서 캐나다 행을 권유하셔서 아무 연고도 없이 토론토에서 포교를 시작했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부처님의 자비를 얼마나 비춰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왔는데 벌써 삼십년이 지났다.
세계일화: 당시 토론토의 상황은?
양일스님: 불교의 황무지였다. 너무나 황량하여 한국의 선불교를 통해 불자와 비불자들을 폭넓게 아우르는 마음의 안식처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초창기에는 교민들이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신도들과 스님 사이에 벽이 느껴졌다. 그것을 나는 “문화의 벽”이라고 보는데, 허물기가 어려웠다. 그러기를 5년…… 그 과정에서 인욕보살도 되어야 했고……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세계일화: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넘기셨나요?
양일스님: 처음 10년간은 온갖 일을 다 했다. 신문배달, 식당청소, 야간 택시운전, 잔디 깎기 등을 해가면서 사찰 운영비를 보탰다. 언어 습득을 위해 학교에도 다녔다. 오십에 캐나다에 와서 토론토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대학입학을 위해 고등학교 성적도 필요했는데 25년 전의 고교 성적을 인정하지 않아 고등학교 과정도 (일부) 새로 들어야 했다. 낮에는 학업, 밤에는 생업에 쫓겼던 힘든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골병만 남았다. (웃음)
세계일화: 포교현장을 그렇게 부대끼면서 얻은 노하우를 말씀 해 주십시오.
양일스님: 첫째로 목숨 바쳐 해야 한다. 혼신을 다 해야 교민들이 그 마음을 느껴 공감하고 다가온다. 작은 일도 소중하게 정성을 다해야 한다. 둘째로, 자기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 설법과 실제 삶이 다르면 호응하지 않는다. 이점은 아주 중요하다. 셋째, 불법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불교문화를 포교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넷째는 해외포교사와 현지 주지스님들의 자질향상이 필요하다. 한국에서부터 현지의 문화와 언어습득을 어느 정도 이룬 후 진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세계일화: 현지인 포교도 계속 해 오신 것으로 압니다.
양일스님: 캐나다 이주 3-4년 후부터 꾸준히 해왔다. 현재 약 20여명의 현지인 제자들이 수행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 참선법회, 연 1-2회 한국 템플스테이 또는 용맹정진을 하고 있다. 지도법사를 네 명 두고 있는데 자격은 3일 용맹정진 10회, 7일 용맹정진 3회 그리고 소정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
세계일화: 현지인 포교를 위한 마음가짐은 무엇입니까?
양일스님: 우선 정직해야 된다. 특히 해외에서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인 것 같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솔직한 모습이 필요하다. 거짓된 모습을 보이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다 떠나버린다. 그 다음으로는 부단한 수행정진이다.
세계일화: 캐나다 승가회에 대해서 한 말씀 해 주세요.
양일스님: Sangha Council of Buddhist Ministry라고 한다. 1997년에 캐나다 소재 100여 개 불교사찰들이 함께 발기하여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외국 사찰에서 행사를 할 때마다 자문, 축사, 법문 등의 요청을 받고 있다. 말하자면 천주교 용어로 표현하면 캐나다 불교계의 주교와 같은 역할이다.
세계일화: 많은 일을 성취하셨는데 앞으로의 계획은?
양일스님: 나는 현재 모든 것을 내놓은 상태다. 이름도 국적도 모두 버렸고 사후에 처리해야 할 일들도 모두 부탁해 놓은 상태다. 모든 걸 놓으니 잡념이 없어 행복하다. 날아갈 듯이 시원하다. 캐나다 대각사 +1-416-588-3251 www.daekaksaofcanada.com
대담 및 정리: 이종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