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화 16호] 불교에서 보는 자유와 평화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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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민호 작성일2012.07.13 조회2,64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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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마음은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만 형체도, 냄새도, 맛볼 수도 없어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면 나를 움직이는 놈이 분명히 있으니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있다고 하자니 볼 수도 없고,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으니 수행자들이 각자가 깨달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 한 마음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원융성(圓融性)이다. 한 마음은 어디에나 어느 존재에나 있으며 전체를 조화롭게 만드는 원융성이 있다고 하셨다. 한 마음에서 한 생각이 찰나 사이에 어디에나 나타날 수 있으며,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고, 현실이 지나치게 양극화 되어 있을 때 전체를 조화롭게 할 수 있는 지혜와 역동성이 있다. 인류 역사에서 왕권에 의해 왕실과 백성 사이에 극심한 양극화 현상이 일어났을 때, 왕권제도가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일어나게 된 것과 전제군주, 공산정권 등의 제도가 새로운 제도로 바뀌는 것과 같이 어떠한 어려움도 원만하게 융합해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성품이다. 한 개인이나 사회가 아무리 지독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은 이 한 마음의 원융성에서 나온다.
둘째는 한 마음의 공성(空性)이다. 태허와 같이 텅 빈 공(空, empty)이지만 이 우주가 이것으로부터 비롯되었으므로 일체 존재에 없는 곳이 없다는 이 원리가 불교의 중생 평등사상이다. 그리고 삼라만상이 다 소멸된다고 해도 이 한 마음은 없어지지 않는다. 한 마음은 시작이 없는 데서 출발하여 끝이 없는 마지막에까지 다 있다는 이 원리가 불교의 불생불멸(不生不滅)사상이다. 그리고 또 이 공(空)에서 일체 삼라만상의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생멸법과 연기법(緣起法)이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한다. 또 이와 같이 생멸이 반복하는 현상이 불교 윤회설(輪回)의 원리이다.
셋째는 한 마음의 반야지혜성이다. 사람들이 식견을 넓히기 위해 지식을 쌓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 지식에서 만들어진 생각으로 문제를 보지 말라는 것이다. 너의 생각은 과거에 있었던 경험이나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니 현재를 보는 눈을 멀게 한다. 결코 사실대로 볼 수 없다. 사실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고통의 원인이다. 세상은 수시로 변하고 있는데 변하는 줄 모르고 보는 눈, 그리고 너라는 독립적인 존재는 본래 없는 것인데 독립적인 나라고 알고 보는 눈은 모두 허망한 것을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니 모두 착각이다. 착각은 병고의 원인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볼 수 있는 반야지혜를 증득하라. 반야지혜는 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법이니, 이 반야지혜를 증득할 때, 비로소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대자유를 얻게 되고 이 자유가 있는 곳에 평화가 있다고 하셨다.
넷째는 한 마음의 자업자득성이다. 어떠한 행위에도 자업자득의 인과법이 따르는 것이니 한 쪽으로는 일체 모든 존재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보시(넓게 베푸는)바라밀(원만하게 완벽한 지혜)에 정진할 것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철저하게 순결한 도덕성을 유지하고, 밖으로 나가는 마음, 밖에서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 마음, 남을 탓하는 마음, 오만한 마음 등을 자신의 한 마음으로 돌려 비춰보고 내 마음의 잘못을 깨우치고 참회함으로서 마음의 고요함과 편안을 얻고, 더 깊이 들어가 모든 병과 고뇌를 치유할 수 있는 창조적 지혜, 반야바라밀이 들어나게 해야 한다. 이 반야바라밀은 생각에서 일어나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창조적 지혜를 의미한다. 반야바라밀과 자비심으로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원을 세우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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