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보스턴 문수사 회주 도범 스님(법보신문 1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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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14.11.27 조회3,08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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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5일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와 성균관대가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진행한 21세기 전통 차 진흥을 위한 대토론회에는 200여명의 차인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전통 차 문화의 의미와 전망’을 주제로 현대 한국사회에서의 전통 차 문화가 어떻게 태동되었는지, 커피 문화에 밀려 있는 차 문화를 어떻게 중흥시킬 것인가에 대한 담론이 펼쳐진 뜻 깊은 자리였다.
일타 스님 은사로 출가해
‘염화미소’ 화두들고 정진
1990년대 보스턴 등지에
문수·보현사 개원해 포교
봉암사 산문폐쇄 첫 단행
법난 당시 총무원서 수습
70년대 정·재·문화계 교류
한국차인연합회 출범 산파
한국 최초의 캔차 ‘심자한’
차 문화 확산을 위해 보급
토우선생에게 자료 제공해
한국식 다구제작 중추역할
일류만 지향하는 경쟁일로
여백없는 사람만 양성할 뿐
찰나 여유에도 성찰한다면
단언컨대 인생이 달라질 것
그 중심에 미국 보스턴 문수사 회주 도범(道梵) 스님이 있었다. 산사의 차 문화 선도 역할은 물론 한국차인연합회 출범의 산파 역할을 담당했던 도범 스님은 이날 1970년대의 차 문화운동 태동기에 얽힌 인연을 담담하게 풀어 놓았다. 도범 스님의 ‘차 인연’은 곧 ‘한국 차 역사’의 대간(大幹)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도범 스님은 1967년 합천 해인사에서 일타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후 화두 ‘염화미소’를 들고 정진했던 선승이였다. 해인사 율원 제1기 졸업생이며, 문경 봉암사 산문폐쇄를 처음으로 단행한 인물이기도 하며, 10·27법난 당시 봉암사에서 결제 중이던 탄성 스님과 대덕 스님들을 모시고 서울 총무원으로 달려가 일련의 사태를 수습하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좀 더 큰 세상을 보겠다’며 돌연 미국 보스턴으로 발길을 돌렸다. 미국의 교육산실이라 불리는 보스턴의 ‘깨어있는 마을(Wakefield)’ 인근에 문수사(1992년)를 창건하고 현지인들에게 선 지도와 함께 부처님 법을 전하기 시작했다. 2년 후인 1994년에는 마이애미에 보현사를 창건했다. 도범 스님을 기억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도 도미 후 여간해서는 귀국하지 않았던 스님의 행보에 기인한다.
6년여 만에 한국을 찾았다. “차 문화계의 원로로서 현대 차 문화가 어떻게 생성 되었는지 증언해 달라”는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의 끈질긴 압력(?)에 “두 손 들었다”고 한다. 그만큼 현대 차 문화 태동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고려의 차 문화가 조선 건국과 함께 거의 사라진 후 초의에 이르러 다시 중흥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차맥은 거의 끊어졌다. 산사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차 보급률이 매우 낮아 대중이 차를 즐길 정도는 아니었다. 차를 우려내는 법이나 마시는 법 등의 기초 행다도 정착돼 있지 않았던 때였고, 일부 사찰에서는 일제강점기에 퍼졌던 일본다도가 행해지고 있었다. 일찍이 일타 스님으로부터 차를 배웠던 도범 스님은 한국 고유의 차 문화를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산중에서 내려오는 제다법이나 행다법을 안다는 사람이 있다는 풍문만 들어도 천리를 마다않고 달려갔다. 큰 수확은 없었지만 한국 차 문화의 전통을 찾으려 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마실 차도 변변치 않아 선혜, 여연 스님과 함께 전남 보성으로 내려가 유종선 거사의 차밭에서 차를 법제해 깡통(캔)에 담아 차인들에게 보급했다. 처음으로 깡통에 차를 담은 이 차의 이름은 심자한(心自閒)이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제대로 된 다구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도범 스님은 해인사 아랫마을에서 자기를 굽던 토우(土偶) 김종희(전 대구 계명대 미대 교수, 2000년 12월 작고) 선생에게 사찰(해인사)에서 쓸 다구를 특별 주문했다.
중국이나 일본의 다구가 아닌 우리 고유의 다구를 청했던 셈이다. 참고할만한 자료조차 없다는 사실을 감안해 전북 정읍에서 구입한 차관 모양의 질그릇과 경남 안의 골동품 상인으로부터 사 두었던 ‘귀 사발’을 전했고(1972년), 토우 선생은 얼마 후 숙우가 포함된 다구세트를 선보였다. 세계 최초의 숙우가 도범 스님의 ‘귀 사발’을 참고한 토우 선생의 손에서 빚어진 것이다. 전통의 한국 차를 우려내고 마시는데 쓰이는 현대 다구는 여기서 출발한다.
도범 스님은 이후 이 다구로 박정희 전 대통령, 박동선 한국차인연합회 이사장 등 정재계 인사들에게 차를 대접하며 ‘한국 전통 차의 확산에 대한 의미와 당위성’을 전했다. 이후 효당 최범술, 아인 박종환, 명원 김미희, 우록 김봉호(초의선집 작가), 박태영 화백 등 차인들과 교류하며 그들과 함께 한국 차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갔다. 결과적으로 1979년 한국차인연합회가 출범하는데 있어 도범 스님은 그 중심축을 맡았던 셈이다.
출가 인연이 궁금하다 하자 스님은 “사람 몸에서 빛이 나오는걸 본 건 난생 처음”이라며 일타 스님과 첫 만남을 회상했다. 1963년 출범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창립발기인이기도 한 도범 스님이 일타 스님을 처음 만난 건 대불련 고승초청 법석에서였다.
“숨이 턱 막히더군요. 자비심 충만한 온화한 미소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법회 회향 직후 스님에게 청했어요. 출가하겠습니다!”
해인사서 행자생활을 할 때 실수를 해도 야단치지 않고 문제의 원인부터 찾게 해주셨던 일타 스님이라고 한다.
“밥이 질면 촉촉해서 좋고, 밥이 되면 꼬실해서 좋고, 밥이 타면 고소해서 좋다 하셨습니다. ‘경험은 천재보다 낫다’ 하시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일러주셨습니다. 사람들을 자비와 지혜로 깨우쳐 주셨던 선지식이었기에 모두가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대학에서 책 꽤나 봤던 도범 스님은 출가해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일타 스님이 선가에 전해오는 소동파 일대사를 전하고는 일렀다.
“이제 책은 그만 보고 선원 가서 참선을 하거라!”
군소리 않고 스승의 말 한마디에 걸음을 재촉했다. 해인사 선방을 시작으로 봉암사, 망월사, 통도사 극락암, 도솔암 등에서 은산철벽과 마주하며 정진해 갔다. 봉암사 주지를 맡게 된 건 주지를 맡고 있던 고우 스님이 건강을 이유로 “더 이상 주지 소임을 맡는 건 어렵다”며 “도범 스님이 대중을 외호해 달라”고 한 당부 때문이었다. 주지 소임 맡은 첫 해에 선원에 싸리담장을 쳤다. 두 번째 해에는 봉암사 대문을 막았고, 세 번째 해에는 일주문을 막았다. 산문폐쇄다.
“봉암사 계곡이 참 좋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찾지요. 잠시 발 담그며 도란도란 담소 나누면 좋을 터인데, 허구한 날 고성방가에 춤추며 고기 굽고 술 먹는 행태가 봄부터 가을까지 이어졌어요. 이건 아니다 싶어 산중회의에서 거론해 결론 내고는 실행에 옮겼습니다.”
수행환경의 중요성을 대중이 인식하기 시작한 건 이 때부터다. 조계종은 1982년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하며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수행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부처님오신날 딱 하루만 산문을 연다.
도범 스님은 봉암사 주지를 맡는 동안 차 문화 확산을 위해 매월 두 차례 저녁예불을 마친 뒤 40여명의 선방스님들을 대상으로 차 문화 강의와 시연을 가졌다. 이는 사찰에서의 최초 ‘차 문화 강의프로그램’으로 기록될 만하다.
도범 스님에게 있어 차는 어떻게 다가올까? 도범 스님의 수상집 ‘구도자의 발자취-봉암사에서 보스턴까지’(2011년, 행림서원) 한 대목이 스쳐간다.
‘산중 암자가 메마르고 적막하기에 차 한 종지에도 가슴이 젖고 산중 맛이 더 깊어지나 봅니다. 심회가 통창해지고 무이한 심신이 풀려갑니다. 청정과 간소함으로 번거로움을 멀리하고 뇌리는 항상 청산을 향해 푸르게 맑힙니다. 이 밤도 찻종지에게 근원적인 삶의 뜻을 묻노라니 머묾은 여여하고 행함은 서서히 하라 합니다. 작은 찻종을 비우고 다시 맑은 향의 차를 채워가며 마시듯 부질없는 생각들을 비워가며 빈자리에 연꽃과 같은 마음을 채웁니다.’
차인이기에 앞서 수행인임을 잊지 않는 도범 스님의 선기를 여실히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차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혜택은 무엇인지 스님께 여쭤보았다. 도범 스님은 치열한 경쟁구도의 한국사회에서 차 한 잔의 여유는 절실하다고 진단했다.
“스위스 교육자 페스탈로치는 ‘신앙 없는 교육은 인간을 교활하게 만든다’ 했습니다. 일류만을 지향하며 비정한 경쟁 속에서 자라온 사람의 가슴에는 여백이 없다 했습니다. 자만과 비정함의 굴레에 갇힌 사람은 결코 ‘멋진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원망의 대상일 뿐이지요. 차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차를 마시려는 노력을 조금씩 늘려가다보면 어느 순간 뜻하지 않은 여유가 내 앞에 놓여있다는 사실에 놀랄 겁니다. 차 한 잔 하는 순간, 그 찰나의 여유를 통해 자신을 성찰한다면 단언컨대 인생은 달라지고 세상 또한 달리 보일 것입니다.”
멋진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 도범 스님은 그 멋진 인생 또한 스스로 설계하는 데 달려 있는 만큼 어떤 틀이나 규약 등의 경계는 없다고 한다. 다만, 결과보다는 과정에 좀 더 무게를 두어 보라고 한다.
“인생의 삶 그 자체가 어떤 종점이나 완성은 아니라고 봅니다. 끝없는 추구요, 체험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추구하고 경험하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그 속에서 행복도 찾을 수 있습니다.”
도범 스님은 어릴 적 할머니가 깨우쳐준 심성 하나를 불자들에게 전했다. 교장선생님이었던 부친은 집안의 꽃밭을 잘 가꾸셨다고 한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꽃밭에 작은 공간이라도 보이면 채소를 심었다.
“할머니께서 꽃밭을 파헤쳐 채소 씨를 심고 가꾸실 때마다 손자인 저는 ‘할머니 여기는 꽃밭이에요’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때마다 할머니는 배부른 소리 마라, 꽃이 밥 먹여 주냐면서 야단치셨습니다. 우리 채소밭에는 채소가 많지 않느냐 물으니 할머니는 ‘땅 한 평 없어 채소 못 갈아먹는 집이 한두 집인 줄 아느냐? 그 사람들 줄란다’ 하셨습니다.”
도범 스님은 임제 스님의 ‘수처작주 입처개진’ 의미를 돌밭감자에 비유해 전했다. 강한 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돌밭감자는 여느 감자처럼 예쁘지 않다. 하지만 그 감자가 세상에 내어 보인 뜻은 너무도 강렬하다고 한다.
“감자가 꽃을 피워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것은 식물의 생태에 형식을 갖출 뿐 오직 뿌리에 근본을 두고 뿌리로 번식합니다. 세 조각, 네 조각으로 갈라져도 각각 살아남기 위해 여기저기 옴폭한 곳에 씨눈을 감추고 있습니다. 조건만 맞으면 싹을 틔우고 제 몸을 썩혀서 거름을 만들어 다시 성장합니다. 자신이 세운 가치실현을 위해 애쓰셔야 합니다. 혹여, 고독할 때는 릴케를 떠올려 보세요. 그는 ‘당신의 외로움은 당신에게 의지의 고향이 될 것이며, 그 외로움으로 인해 당신 자신의 길을 발견할 것’이라 했습니다.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고독해 보이지만 아름답습니다.”
도범 스님은 “우리의 가슴 속에는 고요하고 맑으며 밝은 문이 있는가 하면, 번거롭고 혼탁하며 어두운 문이 있다”고 한다. 어떤 문을 열고 닫으며 살아야 하는지는 자신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 있다. 도범 스님의 당부가 초겨울 바람 소리와 함께 귓전에 맴돈다.
“지난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후회스러웠던 일들은 가슴 밖으로 내보내고 다시 각성해 새로운 창을 열어야 합니다.”
일타 스님 은사로 출가해
‘염화미소’ 화두들고 정진
1990년대 보스턴 등지에
문수·보현사 개원해 포교
봉암사 산문폐쇄 첫 단행
법난 당시 총무원서 수습
70년대 정·재·문화계 교류
한국차인연합회 출범 산파
한국 최초의 캔차 ‘심자한’
차 문화 확산을 위해 보급
토우선생에게 자료 제공해
한국식 다구제작 중추역할
일류만 지향하는 경쟁일로
여백없는 사람만 양성할 뿐
찰나 여유에도 성찰한다면
단언컨대 인생이 달라질 것
그 중심에 미국 보스턴 문수사 회주 도범(道梵) 스님이 있었다. 산사의 차 문화 선도 역할은 물론 한국차인연합회 출범의 산파 역할을 담당했던 도범 스님은 이날 1970년대의 차 문화운동 태동기에 얽힌 인연을 담담하게 풀어 놓았다. 도범 스님의 ‘차 인연’은 곧 ‘한국 차 역사’의 대간(大幹)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도범 스님은 1967년 합천 해인사에서 일타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후 화두 ‘염화미소’를 들고 정진했던 선승이였다. 해인사 율원 제1기 졸업생이며, 문경 봉암사 산문폐쇄를 처음으로 단행한 인물이기도 하며, 10·27법난 당시 봉암사에서 결제 중이던 탄성 스님과 대덕 스님들을 모시고 서울 총무원으로 달려가 일련의 사태를 수습하기도 했다.
▲ 도범 스님은 1992년 보스턴에 문수사를 창건한 후 지금까지 현지인들에게 한국 선의 진면목과 법음을 전하고 있다. |
1980년대 후반 ‘좀 더 큰 세상을 보겠다’며 돌연 미국 보스턴으로 발길을 돌렸다. 미국의 교육산실이라 불리는 보스턴의 ‘깨어있는 마을(Wakefield)’ 인근에 문수사(1992년)를 창건하고 현지인들에게 선 지도와 함께 부처님 법을 전하기 시작했다. 2년 후인 1994년에는 마이애미에 보현사를 창건했다. 도범 스님을 기억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도 도미 후 여간해서는 귀국하지 않았던 스님의 행보에 기인한다.
6년여 만에 한국을 찾았다. “차 문화계의 원로로서 현대 차 문화가 어떻게 생성 되었는지 증언해 달라”는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의 끈질긴 압력(?)에 “두 손 들었다”고 한다. 그만큼 현대 차 문화 태동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고려의 차 문화가 조선 건국과 함께 거의 사라진 후 초의에 이르러 다시 중흥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차맥은 거의 끊어졌다. 산사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차 보급률이 매우 낮아 대중이 차를 즐길 정도는 아니었다. 차를 우려내는 법이나 마시는 법 등의 기초 행다도 정착돼 있지 않았던 때였고, 일부 사찰에서는 일제강점기에 퍼졌던 일본다도가 행해지고 있었다. 일찍이 일타 스님으로부터 차를 배웠던 도범 스님은 한국 고유의 차 문화를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산중에서 내려오는 제다법이나 행다법을 안다는 사람이 있다는 풍문만 들어도 천리를 마다않고 달려갔다. 큰 수확은 없었지만 한국 차 문화의 전통을 찾으려 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 도범 스님은 한국 최초의 한국형 다구세트로 평가받고 있는 토우 김종희 선생의 다구 두 세트를 11월17일 박동춘 소장에게 기증했다. |
마실 차도 변변치 않아 선혜, 여연 스님과 함께 전남 보성으로 내려가 유종선 거사의 차밭에서 차를 법제해 깡통(캔)에 담아 차인들에게 보급했다. 처음으로 깡통에 차를 담은 이 차의 이름은 심자한(心自閒)이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제대로 된 다구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도범 스님은 해인사 아랫마을에서 자기를 굽던 토우(土偶) 김종희(전 대구 계명대 미대 교수, 2000년 12월 작고) 선생에게 사찰(해인사)에서 쓸 다구를 특별 주문했다.
중국이나 일본의 다구가 아닌 우리 고유의 다구를 청했던 셈이다. 참고할만한 자료조차 없다는 사실을 감안해 전북 정읍에서 구입한 차관 모양의 질그릇과 경남 안의 골동품 상인으로부터 사 두었던 ‘귀 사발’을 전했고(1972년), 토우 선생은 얼마 후 숙우가 포함된 다구세트를 선보였다. 세계 최초의 숙우가 도범 스님의 ‘귀 사발’을 참고한 토우 선생의 손에서 빚어진 것이다. 전통의 한국 차를 우려내고 마시는데 쓰이는 현대 다구는 여기서 출발한다.
도범 스님은 이후 이 다구로 박정희 전 대통령, 박동선 한국차인연합회 이사장 등 정재계 인사들에게 차를 대접하며 ‘한국 전통 차의 확산에 대한 의미와 당위성’을 전했다. 이후 효당 최범술, 아인 박종환, 명원 김미희, 우록 김봉호(초의선집 작가), 박태영 화백 등 차인들과 교류하며 그들과 함께 한국 차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갔다. 결과적으로 1979년 한국차인연합회가 출범하는데 있어 도범 스님은 그 중심축을 맡았던 셈이다.
출가 인연이 궁금하다 하자 스님은 “사람 몸에서 빛이 나오는걸 본 건 난생 처음”이라며 일타 스님과 첫 만남을 회상했다. 1963년 출범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창립발기인이기도 한 도범 스님이 일타 스님을 처음 만난 건 대불련 고승초청 법석에서였다.
“숨이 턱 막히더군요. 자비심 충만한 온화한 미소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법회 회향 직후 스님에게 청했어요. 출가하겠습니다!”
해인사서 행자생활을 할 때 실수를 해도 야단치지 않고 문제의 원인부터 찾게 해주셨던 일타 스님이라고 한다.
“밥이 질면 촉촉해서 좋고, 밥이 되면 꼬실해서 좋고, 밥이 타면 고소해서 좋다 하셨습니다. ‘경험은 천재보다 낫다’ 하시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일러주셨습니다. 사람들을 자비와 지혜로 깨우쳐 주셨던 선지식이었기에 모두가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대학에서 책 꽤나 봤던 도범 스님은 출가해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일타 스님이 선가에 전해오는 소동파 일대사를 전하고는 일렀다.
“이제 책은 그만 보고 선원 가서 참선을 하거라!”
군소리 않고 스승의 말 한마디에 걸음을 재촉했다. 해인사 선방을 시작으로 봉암사, 망월사, 통도사 극락암, 도솔암 등에서 은산철벽과 마주하며 정진해 갔다. 봉암사 주지를 맡게 된 건 주지를 맡고 있던 고우 스님이 건강을 이유로 “더 이상 주지 소임을 맡는 건 어렵다”며 “도범 스님이 대중을 외호해 달라”고 한 당부 때문이었다. 주지 소임 맡은 첫 해에 선원에 싸리담장을 쳤다. 두 번째 해에는 봉암사 대문을 막았고, 세 번째 해에는 일주문을 막았다. 산문폐쇄다.
“봉암사 계곡이 참 좋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찾지요. 잠시 발 담그며 도란도란 담소 나누면 좋을 터인데, 허구한 날 고성방가에 춤추며 고기 굽고 술 먹는 행태가 봄부터 가을까지 이어졌어요. 이건 아니다 싶어 산중회의에서 거론해 결론 내고는 실행에 옮겼습니다.”
수행환경의 중요성을 대중이 인식하기 시작한 건 이 때부터다. 조계종은 1982년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하며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수행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부처님오신날 딱 하루만 산문을 연다.
도범 스님은 봉암사 주지를 맡는 동안 차 문화 확산을 위해 매월 두 차례 저녁예불을 마친 뒤 40여명의 선방스님들을 대상으로 차 문화 강의와 시연을 가졌다. 이는 사찰에서의 최초 ‘차 문화 강의프로그램’으로 기록될 만하다.
도범 스님에게 있어 차는 어떻게 다가올까? 도범 스님의 수상집 ‘구도자의 발자취-봉암사에서 보스턴까지’(2011년, 행림서원) 한 대목이 스쳐간다.
‘산중 암자가 메마르고 적막하기에 차 한 종지에도 가슴이 젖고 산중 맛이 더 깊어지나 봅니다. 심회가 통창해지고 무이한 심신이 풀려갑니다. 청정과 간소함으로 번거로움을 멀리하고 뇌리는 항상 청산을 향해 푸르게 맑힙니다. 이 밤도 찻종지에게 근원적인 삶의 뜻을 묻노라니 머묾은 여여하고 행함은 서서히 하라 합니다. 작은 찻종을 비우고 다시 맑은 향의 차를 채워가며 마시듯 부질없는 생각들을 비워가며 빈자리에 연꽃과 같은 마음을 채웁니다.’
차인이기에 앞서 수행인임을 잊지 않는 도범 스님의 선기를 여실히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차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혜택은 무엇인지 스님께 여쭤보았다. 도범 스님은 치열한 경쟁구도의 한국사회에서 차 한 잔의 여유는 절실하다고 진단했다.
“스위스 교육자 페스탈로치는 ‘신앙 없는 교육은 인간을 교활하게 만든다’ 했습니다. 일류만을 지향하며 비정한 경쟁 속에서 자라온 사람의 가슴에는 여백이 없다 했습니다. 자만과 비정함의 굴레에 갇힌 사람은 결코 ‘멋진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원망의 대상일 뿐이지요. 차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차를 마시려는 노력을 조금씩 늘려가다보면 어느 순간 뜻하지 않은 여유가 내 앞에 놓여있다는 사실에 놀랄 겁니다. 차 한 잔 하는 순간, 그 찰나의 여유를 통해 자신을 성찰한다면 단언컨대 인생은 달라지고 세상 또한 달리 보일 것입니다.”
멋진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 도범 스님은 그 멋진 인생 또한 스스로 설계하는 데 달려 있는 만큼 어떤 틀이나 규약 등의 경계는 없다고 한다. 다만, 결과보다는 과정에 좀 더 무게를 두어 보라고 한다.
“인생의 삶 그 자체가 어떤 종점이나 완성은 아니라고 봅니다. 끝없는 추구요, 체험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추구하고 경험하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그 속에서 행복도 찾을 수 있습니다.”
도범 스님은 어릴 적 할머니가 깨우쳐준 심성 하나를 불자들에게 전했다. 교장선생님이었던 부친은 집안의 꽃밭을 잘 가꾸셨다고 한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꽃밭에 작은 공간이라도 보이면 채소를 심었다.
“할머니께서 꽃밭을 파헤쳐 채소 씨를 심고 가꾸실 때마다 손자인 저는 ‘할머니 여기는 꽃밭이에요’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때마다 할머니는 배부른 소리 마라, 꽃이 밥 먹여 주냐면서 야단치셨습니다. 우리 채소밭에는 채소가 많지 않느냐 물으니 할머니는 ‘땅 한 평 없어 채소 못 갈아먹는 집이 한두 집인 줄 아느냐? 그 사람들 줄란다’ 하셨습니다.”
도범 스님은 임제 스님의 ‘수처작주 입처개진’ 의미를 돌밭감자에 비유해 전했다. 강한 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돌밭감자는 여느 감자처럼 예쁘지 않다. 하지만 그 감자가 세상에 내어 보인 뜻은 너무도 강렬하다고 한다.
“감자가 꽃을 피워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것은 식물의 생태에 형식을 갖출 뿐 오직 뿌리에 근본을 두고 뿌리로 번식합니다. 세 조각, 네 조각으로 갈라져도 각각 살아남기 위해 여기저기 옴폭한 곳에 씨눈을 감추고 있습니다. 조건만 맞으면 싹을 틔우고 제 몸을 썩혀서 거름을 만들어 다시 성장합니다. 자신이 세운 가치실현을 위해 애쓰셔야 합니다. 혹여, 고독할 때는 릴케를 떠올려 보세요. 그는 ‘당신의 외로움은 당신에게 의지의 고향이 될 것이며, 그 외로움으로 인해 당신 자신의 길을 발견할 것’이라 했습니다. 무소의 뿔처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고독해 보이지만 아름답습니다.”
도범 스님은 “우리의 가슴 속에는 고요하고 맑으며 밝은 문이 있는가 하면, 번거롭고 혼탁하며 어두운 문이 있다”고 한다. 어떤 문을 열고 닫으며 살아야 하는지는 자신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 있다. 도범 스님의 당부가 초겨울 바람 소리와 함께 귓전에 맴돈다.
“지난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후회스러웠던 일들은 가슴 밖으로 내보내고 다시 각성해 새로운 창을 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