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이

공덕을 성취하는 지름길

착하지만 가난한

몽매하지만 조금씩

깨어나고 있는 마사이족이

내게 주어진 부처님”

 

교육을 통해 변해 가는

아이들을 볼 때 큰 보람…

섣불리 꿈꾸지는 않아

 

“이들의 삶이 하루하루 1%만

더 나아지기를 바라며” 기도

  
지난 7월21일 서울 조계사에서 만난 탄하스님. 지구촌공생회가 케냐에 건립한 학교를 관리하고 주민들의 복리후생을 돕고 있는 스님은 “아프리카에도 한국불교의 자비가 전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아프리카는 불교의 입장에서도 검은 대륙이다.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불교가 자리를 잡았지만, 여전히 부처님이 생소한 땅이다. 지구의 6대륙 가운데 한국 사찰이 단 한 곳도 없는 대륙으로 알려졌다. 최근 종단은 탄자니아에 현지인들을 위한 학교인 보리가람고등학교 불사에 나서면서 온정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탄하(呑河)스님은 아프리카 포교의 선두주자 가운데 한 명이다.

2014년 7월 불교계의 대표적인 국제구호단체인 지구촌공생회(이사장 월주스님) 케냐지부장으로 부임했다. 지구촌공생회가 한국불자들의 후원으로 건립한 엔요노르 영화초등학교, 올로레라 태공초등학교, 올마피테트 만해중고등학교 등 3곳의 학교를 관리하고 우물파주기 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2012년 보츠와나와 짐바브웨를 여행하면서 풍경을 좋게 봤다. 무엇보다 어릴 때 유난히 흑인을 무서워했다. 나이가 드니 그 마음이 미안해졌다. 낯설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피부가 검고 가난한 사람들과 여태껏 마음을 나누는 이유다. 너무 늦지 않게, 케냐에 제대로 된 법당 한 채 세우는 것이 꿈이다.

1년에 한 달 정도만 한국에서 지낸다. 스님이 교유하는 아프리카인은 마사이족이다. “심성은 비할 바 없이 착하고 순한 사람들”이다. 포근하고 여유롭다. “조금만 빨리 말한다 싶어도 화내지 말고 천천히 말하라”며 다독인다. 물론 ‘느림’은 현대인들이 동경하고 목말라하는 가치이지만, 좋은 것만은 아니다. ‘느려터짐’은 괴롭다.

저개발국의 능률과 속도는 답답하다. 관청에 보낸 공문의 회신을 받으려면 1년을 기다리기도 한다. 쓰레기는 휴지통에 버리는 것이 문명의 상식이건만, 여기서는 집안 전체가 쓰레기장이다. 순박한 사람들은 친절의 표시로 자기 집의 방을 내어주지만, 도저히 잠을 청할 수가 없는 공간이다. 공중도덕에 대한 무시는 견디기 힘든 습관이다. 산속 학교의 경우 1년에 20명의 여자 아이들이 임신을 한다. 그야말로 근대화가 절실한 마을이다. 아프리카하면 으레 더울 것이라 생각하지만 케냐는 사시사철 시원하고 따뜻한 나라다. 날씨 하나는 복 받은 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덥다.

지구촌공생회가 그래서 나섰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학교를 지어주고 우물로 안전한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 농장도 운영하며 주민들의 갱생(更生)도 돕는다. 탄하스님의 하루는 오전 5시부터 시작된다. 간단히 예불을 하고 사무실로 나간다. 수도 나이로비에서 차로 2시간 이상을 달려야 만날 수 있는 시골이다. 현지인 직원들과의 회의를 통해 그날 해결해야 할 일을 정리한다. 현장점검이 일상의 대부분이다. 집도 고쳐주고 학교도 고쳐준다. 우물물은 깨끗한지 검사한다. 학교 급식도 직접 시장을 봐서 사다준다. 한번은 교직원들에게 급식재료를 사라고 돈을 줬더니, 그 돈으로 일수놀이를 하고 있는 걸 적발하곤 그때부터 이런다.

학교폭력도 심했다.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축구공처럼 차는 게 다반사였다.” 케냐지부장 소임을 맡기 전 탄하스님은 의성군노인복지관 관장으로 일했다. 복지관 관장으로 12년간 재직한 경험은 애당초 다부졌던 성격을 더욱 깐깐하게 만들었다. 틈을 주면 바로 되치기 당한다. 집요하게 으르고 달래가며 결국은 감정적 체벌을 근절했다. ‘미안하다’는 말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주민들에게서 이제는 자연스럽게 또한 수시로 사과를 받아낸다.

아이들이 가장 불쌍하다. 일하지 않는 어른들 덕분에 일찍부터 노동력을 착취당한다. 2시간을 걸어서 학교에 온다. 대다수가 아침을 굶고 온다. 염소가 있는 집만 우유 한 잔을 먹을 수 있다. 학교에서 급식을 주지 않으면 점심도 굶어야 한다. 깡마른 체구에 배만 볼록 나온 영양실조가 만연해 있다. 예상하다시피 문맹률은 심각하다. 농장에서 옥수수와 양파와 콩을 가꾸며 이들을 먹인다. 스님은 “불교가 국가의 정식 종교로 등록되면 법당도 짓고 영어공부도 시키며 보다 훌륭한 여건에서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있을 텐데 아직은 아쉽다”고 했다. 케냐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은 1500여 명이다. 이 가운데 선교사만 700명이다. 나머지는 선교사의 아내나 자녀들이다.

비교종교학이 유입되면서 지식인들은 불교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알지만 여전히 먼 동네 이야기다. 동네에서 불자는 탄하스님 한 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사무실에 작은 부처님을 모셨고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면 비빔밥을 푸짐하게 만들어 사람들과 나눠먹는다. 스님은 섣불리 꿈꾸지는 않는다. “이들의 삶이 하루하루 1%만 더 나아지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지난해 11월 스님은 뜻 깊은 광경을 목격했다. 그 나라의 어린이날 행사 때였다. 권위적이기만 했던 교사들이 화풀이 대상으로만 여겼던 학생들의 밥을 손수 챙겼다. 아무데나 내던져지던 쓰레기들은 차 안에 마련한 커다란 봉지 안에 질서 있게 담겨졌다. 적어도 지구촌공생회가 지원하는 학교 3곳은 청결하다. 하교하기 전에는 늘 책걸상이 정리돼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성교육을 포함해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다. “단순히 물질을 제공하는 단체가 아니라 주민 스스로 변화를 이뤄 자립을 돕는 단체가 되겠다”는 지구촌공생회의 운영방향이 실현되고 있어 뿌듯하다.

스님의 고향은 강원도 양양이다. 본래 장로교 신자였다. 사춘기를 혹독하게 앓으면서 평범했던 소녀의 삶에 균열이 생겼다. 낙산사에 아는 스님이 있었는데, 스님은 매일 시 한 편을 외우게 했다. 그게 인연이 되었나 보다. 대학입시에 낙방하고 시무룩한 마음에 절을 찾았다. 딱 보름만 기도하고 나오자고 했는데 그대로 눌러앉게 됐다. 스님이 출가를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반해서다. 부처님의 아름다운 말씀은 여전히 스님의 몸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것. 이것이 공덕을 성취하는 지름길입니다. 착하지만 가난한, 몽매하지만 조금씩 깨어나고 있는 마사이족이 제게 주어진 부처님이지요.”

원래는 케냐에 2년만 있으려고 했다. 네팔에서 포교를 하다가 “순박한 불자들의 나라” 미얀마에서 인생을 회향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변화와 보람이 스님의 발목을 잡았다. “물이 없는 지역에 물을 나누어 줄 때도, 인키니 농장 가득 푸른 작물이 자라서 시장에 내다 팔 때도 주민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지만, 교육을 통해 변해 가는 아이들을 볼 때가 가장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언제까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오래 있을 것이다. 스님은 100도 이상에서 끓이지 않은 우유를 먹다가 브루셀라 풍토병에 걸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씩 피를 뽑으며 검진을 받는다. 그래도 괜찮다. 보살의 기쁨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케냐 현지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탄하스님(사진제공=지구촌공생회).

■ 탄하스님은… 

1987년 임대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88년 월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1992년 일타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중앙승가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2002년부터 경북 의성군노인복지관 관장으로 재직하다가 2014년 지구촌공생회 케냐지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아프리카 포교에 진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