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일화 22호] 감동과 환희의 인도・네팔 성지 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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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기섭 작성일2013.01.16 조회2,035회 댓글0건본문
<쿠시나가르 대열반탑(부처님 다비장)>
불자라면
평생의 단 한 번이라도 다녀오고 싶은 부처님의 나라
세계의 유명한 여행가들이 한결같이 세상 마지막에 남을 여행지로 꼽는 나라
인도와 네팔을 다녀왔다.
한국불교종교지도자 인도・네팔 불교문화 교류사업의 일원으로 우연히 찾아온 인도 방문 기회를 통해 불자로서의 숙원을 풀었고 감동 하였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본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제 인도를 다녀온 지 한 달이 지난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깊은 감동과 여운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망각의 동물임을 익히 알고 있어서이며, 마치 지금 잃어버리면 너무 많은 것을 놓고 살 것 같다는 나 자신의 조바심이 앞서서다. 부처님의 성지가 방치되듯 순례객을 기다리는 이 나라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던 첫 경험에 대해 내 수양의 부족을 탓할 기회가 사라질 것 같아서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나라마다 독특한 냄새가 난다고들 한다. 여행을 통해서 얻었던 편안함에서 오는 것인지 경험과 흥미진진한 볼거리에서 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인도의 냄새는 무엇이었을까? 혼란스러움과 거리의 소음, 그리고 비포장도로의 먼지가 얹힌 인도식 카레냄새? 확실히 인도 델리 공항에 도착해서 느낀 인도는 청결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왠지 모를 답답함.
인도에 도착한 늦은 새벽에 여독에 지친 일행의 표정과는 달리 길게 늘어선 줄에도 밝은 웃음과 여유가 느껴지는 인도인들의 느긋함이 차이가 있어 보였다. “이 나라가 그런 나라입니다”라는 안내의 말에도 전혀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 남아 있는 찝찝함이란. 그렇게 인도에 도착한 것이 실감 나는 하루였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부처님의 성지를 찾아 바라나시로 떠났다.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비행기를 타기 위해 거치는 기다림.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가 당당히 무시당하는 인도의 시스템을 또 한 번 느끼며 부처님의 초전 법륜지 녹야원으로 이동했다. 녹야원에서의 도착한 나는 무척 허망함을 느꼈다.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 것일까? 우리가 흔히 녹야원에서 다녀왔음을 상징하듯 찍어오는 다메크 스투파를 제외하고 남은 것이라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사지 흔히 절터였다. 부처님의 성지마다 조성된 부서진 석주만이 이곳이 부처님의 초전법륜지 녹야원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타국에서 온 수행자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무너진 법당 앞에서 절하고 간략한 예불을 드리는 와중에도 부처님의 광명을 찾아보려고 애쓰지만, 실상 보이지 않는 허망함 앞에 내 낮은 불교적 수행에 아쉬움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에 의해 파괴된 성지를 보고, 부처님이 남기신 자비의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새로운 원망과 탓하는 마음만 채우고 있었다.
이러한 무거운 맘으로 찾은 갠지스 강. 인도인이 죽기 위해, 죽음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찾는 장소, 신성한 장소인 갠지스 강. 이 강에 모든 것을 포용하는 정신이 녹여있다고 말하기에는 내 눈에는 더러움이 가득했다. 가트에 죽은 시신의 화장을 위해 피워놓은 불에도 부와 신분에 따라 불 높이가 결정되는 이 나라의 어떤 것이 여행자와 순례자에게 영감과 만족을 주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와 다른 의식을 지녀서? 아니면 이 강에 생로병사가 다 녹여있다고 생각해서? 첫인상이 그래서인지 뭐든지 삐딱하게 바라보는 내 아집이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스스로 자책하지 않을 수 없는 하루였다. 만약 보드가야를 먼저 갔더라면.....
다음날 시차 때문에 무거워진 눈꺼풀을 뒤로하고 도착한 보드가야, 부처님의 성도한 보리수와 금강좌, 7선처의 존귀한 발자취를 느끼기 위해 일행이 움직였다. 그리고 만난 보드가야 대탑의 위용. 비로소 부처님의 성지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대탑 안 법당의 떨림 있는 예불을 드리고, 보리수를 바라보며 참선에 든 시간. 주변의 새소리를 놓치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정적의 시간을 갖은 이후 내 마음가짐이 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역시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허상에 벗어나질 못했음을 확 깨우쳐준 소중한 장소였다. 아직은 보이는 것에 크게 감동을 하는 한 중생의 마음이지만 이 때문에 얻은 소중한 깨달음은 평생에 느끼지 못한 그것이었다. “아~ 이래서 불자라면 성지에 꼭 가야 되는구나”라고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그 감동의 순간은 느껴보지 못한 사람에게 전달하기 무척 어렵겠구나 싶다. 하루의 시간이 할애될 수 있다면 줄곧 대탑과 보리수를 향해 오체투지와 참선의 시간을 갖고 싶은 열망이 자리 잡았다. 특히 총무원장스님이 감격해 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일정 내내 먹먹한 가슴으로 성지를 다시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쿠시나가라 열반당 순례, 80년의 세수를 뒤로하고 누워계신 부처님의 발에 숙연하게 자신들의 공경을 다하는 세계 여러 불자의 모습에 감동을 했던 장소이다. 떠나신 육신의 체온을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영혼의 울림으로 남기고 가신 부처님 열반상의 모습.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보면서 깨달은 분의 위대한 가르침을 다시한번 마음속에 갈무리해봤다.
주변의 대한사와 베트남 사찰을 통해 우리 한국 불교가 가야 할 길이 멀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적 지원으로 세워지고 한참 불사 중인 세계의 여러 사찰을 보고 있노라니, 이와 비교하여 개인의 원력에 기대 불사하고 있는 한국 사찰의 현실에 대한 벽은 너무 높아 보였다. 국제팀장이라는 직책의 무게가 전과는 무척 다르게 다가왔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역할을 빨리 찾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났다. 룸비니의 대성석가사를 방문했을 때도 역시 이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한평생 부처님의 성지에서 불사하고 계신 스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승단을 만들고, 승단을 보필해야 하는 우리 재가 불자들의 노력이 아직 미치지 않는 곳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룸비니 동산, 부처님께서 이 땅에 첫 발자국이 있는 곳이다. 이곳을 가기 위해 국경을 넘었고, 인도의 기다림 시스템을 또 한 번 느끼게 해준 곳이다. 이제 깨달음에 조금 가까워진 것일까? 기다림에 익숙해진 나는 이제 기다리는 것에 별 변화된 감정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룸비니는 지금 한창 불사가 진행 중이었다. 현지 룸비니 개발위원회는 국가적 지원으로 적극적인 성지 복원에 나선 상태이고, 세계의 주요 불교국가에서 룸비니 국제불교 사원구역 내 사찰 불사를 하는 상황이다. 인도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네팔의 성지 복원의지는 객관적으로 훨씬 높아 보였다. 그리고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가 네팔에 있음을 알리기 위해 네팔의 불자들이 세계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음을 다시한번 알게 되었다. 얼마 전 한국의 교과서에 부처님의 탄생지를 인도라고 표기한 교과서가 무려 13종이라고 하니 부처님 탄생지의 나라라는 자부심이 있는 네팔 불자들이 이러한 운동을 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졌다. 룸비니 개발위원회 부위원장이신 장부셀파스님의 도움으로 마야데비 사원 내에서 예불을 드릴 수 있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부처님의 탄생지를 이러한 인연으로 우리가 룸비니를 방문하게 되었다. 불기2557년 과거의 부처님을 현재의 부처님과 같이 느낄 수 있는 가르침의 시작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니 인연의 신묘함이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이런 호사를 누렸으니 다른 인연의 발걸음에 도움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개인적 원을 빌며 룸비니를 뒤로했다.
인도의 4대 성지인 룸비니, 보드가야, 녹야원, 쿠시나가라(열반당)를 돌아보며, 부처님의 발자취를 흠씬 느낄 수 있는 일생일대의 소중한 인연을 얻었다. 비록, 부처님의 탄생, 성불, 전법, 열반의 길을 순리대로 찾지 못했음에도 성지가 주는 가르침만으로도 2500여 년이 지난 지금 한 불자의 가슴을 흔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처음 하루 이틀 동안 나 자신의 오만과 삐뚤어짐만 아니었다면 온전히 느낄 수 있었을 인도였기에 돌아보니 너무 아쉽다. 그 아쉬움 때문에 배낭을 메고 다시 찾게 될 것이라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겠다. 글-총무원 사회부 국제팀장 권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