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불교학회 회장 리처드 곰브리치 교수 _ 중앙일보 08.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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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8.08.26 조회2,876회 댓글0건본문
7일 서울 동국대 교정에서 만난 리처드 곰브리치 교수는 “영국에선 중국 이민자들이 믿는 중국 정토종,
티벳불교, 남방불교 등이 알려져 있다. 한국 선불교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그런데 서양에선 한국 선불교를 잘 모른다.
영역화 작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사진=최민규 인턴기자]
영국 불교학회 회장 리처드 곰브리치 교수
“나는 종교 없어 … 신의 존재, 불교 윤회 안믿어”
49년째 연구, 불교 윤리관에 맞춰 살려고 해 7일 서울 동국대 교정에서 리처드 곰브리치(71) 교수를 만났다.
그는 현재 영국불교학회 회장이다. 2004년 은퇴한 그는 옥스퍼드대에서 무려 28년간 초기 불교와
산스크리트어를 가르쳤다. 1959년에 시작한 그의 불교 연구는 올해로 49년째다. 지금은 옥스퍼드대
불교학센터에서 학술원장을 맡고 있다.
인터뷰 장소로 갔을 때 곰브리치 교수는 늦은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강의가 늦게 끝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3일부터 17일까지 동국대에서 ‘불교의 문화’란 주제로 하루 3시간씩 10차례 여름학기 강의를 하고 있다.
그에게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는 “제로(Zero)”라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나는 부디스트(불자)가 아니다. 불자는 아니지만, 불자들보다 불교를 더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당신은 49년째 불교를 연구 중인 불교학자다.
부디스트가 아니라고 하니 다소 뜻밖이다.
“나는 종교를 믿는 데 실패했다. 왜냐하면 나는 신이 있다는 것도,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도 믿을 수 없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다는 불교의 윤회(Rebirth)도 믿을 수 없다. 그래서 부디스트가 될 수가 없다.”
-그럼 불교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나는 종교가 없다. 그러나 인류가 종교적 성향을 중요시하는 게 삶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에는 매우 공감한다.
그리고 나는 부디스트(불자)에겐 기본적으로 ‘종교’라는 용어가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불교는 종교적
외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거다. 불교적 삶의 방식을 말하는 거다.”
-예를 들면.
“붓다는 우리의 모든 행위와 결과가 서로 연관돼 있음을 알아차렸다.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한다는 거다. 그게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업)’다. 나는 불교의 그런 점이 특히 좋다.”
- 처음 불교를 접한 것은 언제였나.
“열 여섯 살 때였다. 아버지(2001년 작고한 그의 아버지는 32개국 언어로 번역돼 600만 부가 넘게 팔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의 저자 에른스트 곰브리치다)의 서재에서 불교 서적을 처음 읽었다.
그리고 방금 얘기한 점들에 매료됐다. 불교뿐만 아니다. 당시 힌두교 등 동양 종교에도 관심을 두루 가졌다.”
-부처님 당시의 초기 불교를 연구했다. 이유가 있나.
“‘초기 불교’를 통해 붓다를 더 많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초기 불교 경전만 다루지 않는다.
힌두교와의 대비 속에서 그걸 다룬다. ‘우파니샤드’ 같은 문헌들과 비교해 읽으면서 당시 지적(知的) 사회와
붓다가 어떻게 대화하고, 논쟁하면서 갔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초기 불교’가 더욱 흥미롭다.”
-불교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다. 한국의 선(禪)불교를 어찌 보나.
“한국 선불교는 경험이 없다. 거기에 대해 말하기 어렵다.”
-그럼 남방불교의 위파사나 수행은 어찌 보나.
“위파사나는 초기 불교의 승려들이 행했던 수행이다. 그런데 위파사나는 훌륭한 스승이 없으면
상당히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인도의 명상 수행은 기본적으로 ‘1대1’이다. 스승과 제자, 1대1 관계의 명상이었다.
스승이 제자의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훤히 꿰뚫으며 했던 것이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
-요즘은 어떤가.
“요즘은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빅 클래스’로 진행된다. 심지어 태국에는 학교에 ‘위파사나’ 과목이 있다.
수행 정도에 관한 시험도 보고, 점수도 매긴다. 수행의 지나친 단순화, 이건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지난해 성철 스님 ‘백일법문’의 영어화 작업에서 직접 윤문을 보았다고 들었다. ‘백일법문’은 어땠나.
“초기 불교에 대한 성철 스님의 이해는 다소 달랐다. 그러나 그건 ‘젠 마스터(선지식)’가 선종의 입장에서
초기 불교를 해석한 것으로 본다. 가령 붓다는 인생의 쾌락과 고행, 그 사이의 ‘중도’를 말했다.
태국과 버마, 스리랑카 불교에서도 이렇게 해석한다. 그런데 성철 스님은 존재와 비존재, 그 사이의 ‘중도’로 풀었다.
그건 동북아 선불교의 특징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렇게 불교의 아이덴티티(정체성)를 재창조한 것이라고 본다.”
-불교는 피안의 땅을 ‘아는 것’이 아니라, 피안의 땅을 ‘딛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한다.
당신은 일상 속에서 수행도 병행하나.
“따로 수행을 하진 않는다. 나는 부디스트가 아니다. 다만 불교적인 생활 방식을 따르려고 한다.
불교적 윤리관에 맞춰 살아가고자 한다.”
-궁금하지 않나. 직접적인 수행을 통해 새로운 걸 느낄 수도 있지 않나.
“스리랑카에서 오래 머물며 현장 연구를 한 적이 있다. 스리랑카 수행승들과 현지어로 인터뷰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행 과정에서 그들이 무엇을 느끼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지를 들었다.
그런데 그들은 기본적으로 ‘윤회관’에 입각해서 말을 했다. 나는 거기에 수긍할 수가 없었다.”
-그럼 수행과 연구는 어떤 관계인가.
“축구를 전혀 못하면서도 축구에 대해 정말 좋은 책을 쓸 수도 있다. 나는 불교에 대한 수행과
학문적 연구를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성철 스님은 “불교 경전만 읽는 것은 금강산을 보지 않고,
금강산에 관한 여행 가이드 북만 보는 격 ”이라고 말했다.
“나는 여행 가이드 북을 읽는 것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모든 사람이 이 생에서 다 깨달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수도 없이 불교 경전을 읽었을 것이다. 가장 가슴에 담아두는 구절은.
“법구경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증오는 증오에 의해선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 증오는 사랑에 의해서만 무너뜨릴 수 있다.’
그리고 붓다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증오를 부른다.’”
중앙일보 08.07.10 일자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