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교민여러분!(불교신문 1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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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그루 작성일2013.05.20 조회1,810회 댓글0건본문
“타인에게 은혜를 받았을 때 비록 그것이 작은 은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물며 큰 은혜를 받았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잡아함경)
2013년 3월 20일 아침, 보슬비가 내렸다. 독일 통일 이전의 수도였던 본(Bonn) 옛 한국대사관 앞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예정된 10시 출발에 맞추어 가방을 메고 우비를 썼다. 한 손에는 태극기와 독일 국기를 그리고 다른 손에는 세계불교기를 들고 “한국과 독일의 우호증진을 위하여 출발!”을 외치며 양 손을 번쩍 들고 첫 발을 내딛었다.
라인(Rhein) 강을 따라 Ko"ln 시내로 접어드니 저 멀리 157m 높이의 대성당 탑 두 개가 보인다. 가톨릭의 역사와 색다른 건축양식에 유럽 문명의 고풍스러움이 다가온다. 잠시 성당에서 기원을 올린다.
“한국과 독일 사람이 서로 깊은 친구가 되고, 상생하는 사이가 되기를.”
첫 날 뛴 거리는 40km. 엘리자베스(Elizabeth) 수녀원으로 갔다.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Hedwig 원장 수녀님과 한국인 수녀님, 간호사 출신 안나 할머니께서 일행을 맞아 주신다. 여성 수도자들이 머무는 독일 수녀원에서 숙식 제공을 받으니 종교 간의 평화가 느껴졌다.
에센(Essen) 한인문화회관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안전하게 뛸 수 있는 자전거 길을 찾아 우왕좌왕했다. 다행히 “한독수교 130주년 기념 본(Bonn)에서 베를린(Berlin)까지 700km 달린다”는 가슴에 부착한 독일어 홍보물을 보여주면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진다. 막히는 상황에서 신기하게도 일이 풀린다. 불보살님 가피력을 믿었기 때문에 두려움은 없었다.
교민회관에는 김계수 박사, 고창원 재독 Glueck Auf 회장, 윤행자 한독간호협회장 외 20여분의 한인회분들과 만찬공양 겸 간담회가 이어졌다. (Glueck Auf는 '죽지 말고 살아서 올라오라'는 독일어)
“뭐하러 그 먼 거리를 뛰러 왔느냐?” “한국 사람들은 열심히 독일사회에 적응했다.” “한국에 있는 외국노동자들에게 사회보장 혜택을 주어야 한다.” “종교인들이 세금을 내야한다”는 말씀이 기억난다.
“1963년 출생한 세속 나이와 파독광부 50년이 같고,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가정폭력 피해 결혼이주여성을 돕는 꿈을이루는사람들 단체를 운영하면서 20대 청춘에 독일로 와서 70대에 이르기까지 이주민의 삶을 살아 온 교민들이 국내 이주민의 어려움을 더 잘 이해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교민의 희생속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이 있었음에도 그 고마움을 잊은 듯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국민을 품어준 독일 사회와 교민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한국인의 강한 의지를 드러내어 교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양 국가 사이의 미래 발전에 작은 씨앗이 되고자 달리고 있습니다.“
한인회관에 전시된 파독광산박물관의 각종 자료와 재현된 탄광 갱도모형물을 둘러 봤다. 1000m와 3000m 지하 막장에서 1m를 파 들어갈 때마다 4~5마르크를 추가로 준다기에 무릎을 기며 일했던 1진 광산근로자 120여명이 1회 이상의 골절상 병력을 앓고, 실명하거나 사망자도 있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염불을 한다. 조용한 시골 마을을 달리며 천수경을 큰 소리로 외우니 온 천지가 법당이었다.
Parderborn 지역 경찰관이 나를 세운다. “뭐 하느냐?” “베를린까지 뛰는 중이다” “여권을 보여 달라” “나는 한국에서 온 불교 스님이다. 한국과 독일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마라톤을 하고 있다” “뭐라고? Great! 완주하시길.” “당케!” 큰 덩치의 경찰관이 제지하면 어떻게 하나 고민했는데 오히려 잘 도착하길 바란다는 말에 웃음이 났다.
달리고 있는 1번 국도는 나폴레옹 황제가 러시아 원정 때 다녔던 길이다. 우연치곤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승복을 입고 달리는 나에게 사람들의 호기심은 특별했다. 대형 트럭 운전사는 크락션 소리나 손을 들고, 일부의 젊은이는 창문을 내려 환호를 보낸다. 그것은 도전을 하는 사람에게 격려와 공감하는 높은 수준의 사회 분위기로 느껴졌다. 드넓은 땅과 숲은 부러움 그 자체였다. 오늘까지 누적거리는 380km. 남은 거리는 320km.
27일 아침. Magdeburg로 출발한다. 얼마나 달렸을까? Braunschwieg 입구에서 반기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베를린한인회장을 역임하고 2010년 손기정 베를린 마라톤대회를 처음 개최하신 김진복님, 다른 분은 한국에서 마라톤을 함께 하던 최종한 님으로 남은 일정을 함께 뛰고자 오셨단다.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이제 고생은 끝인가?
동행 마라토너가 생기니 평소 먹는 점심 빵이 맛있다. 9일차, 밖에는 눈이 내린다. 날씨가 따뜻해야 좋은데 점점 강추위가 닥치니 심난하다. 하지만 추위가 앞길을 막기에는 우리의 열정이 더 뜨거웠다.
반환점을 돌아 Burg로 향하는데 누군가 멀리서 사진을 찍는다. 가까이 갈수록 우리에게 팔을 높이 들라고 한다. Thomas Rauwald는 독일 Dilom-Journalist 이다. 힘이 솟는다는 표현은 이런 기분일 것이다.
29일 금요일, 부활절 연휴가 시작된다. 집집마다 예쁜 달걀모양과 토끼 모형을 내걸어 둔다. 오랜 풍습과 문화란 삶의 철학이 함축된 흔적이다. Potsdam 근처 Clindow 마을에서 민박을 했다. 구형 자가용이나 소형차를 운전하는 독일인에게서 검소함을 배운다. 강 길을 따라 숲속을 달리니 다양한 사람들이 운동을 한다. 마라톤이란 공통점 때문에 서로에게 인사를 나누며 추억을 사진에 담았다.
역시 700km 홍보물을 보고 하는 말, 어메이징(Amazing!)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포츠담의 동독과 서베를린 경계지점인 Clienick 다리를 지난다. 한강 철교와 비슷한 이 다리는 한 번 건너면 돌아올 수 없다는 별칭을 갖고 있어 나에겐 특별한 감정으로 다가와 오래 머물렀다.
100m 다리를 건너니 Berlin 간판이 보인다. 그토록 손꼽았던 베를린이 이곳이란 말인가? 다 왔다는 안도감을 뒤로하고 목표 거리를 채우기 위해 강을 끼고 숲길로 달린다.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와 평생을 함께 살아 온 노부부의 뒷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길을 재촉해 히틀러시대에 유태인을 강제수용소로 보냈던 Wannsen 역을 방문했다. 사람들이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Korea라고 했더니 북한? 남한? 참 속상했다. 남북 분단이 영구히 고착되어서는 절대 안 됨을 말하고 싶다.
포츠담 중앙거리는 양쪽으로 상점이 늘어서 있고, 휴일이라 사람들로 북적인다. 어느 독일 부부가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다. 사업차 한국에서 지냈다니 뜻밖의 인연이고 감동이었다.
다음날 일행과 함께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 Cecilien 궁전을 찾았다.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미국 대통령 트루먼, 영국 총리 처칠, 중국 총통 장개석, 러시아 서기장 스탈린이 정상회담 했던 곳. 일본의 항복과 조선의 독립이 확인되는 선언이었지만 일본의 거부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끝나게 된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열렸던 광장으로 갔다. 마라톤 부문에서 1위를 하신 손기정옹께서 달렸던 코스를 따라 뛰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라 한다. 오늘날 올림픽 마라톤대회 코스와 달리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나타나는 지옥의 코스에서 손기정옹은 골인지점을 앞두고 죽을 각오로 달렸을 것이다. 나는 그 길을 태극기를 들고 약간의 분연한 마음으로 달린다. 내 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고, 불심으로 달리고 있었다.
드디어 4월1일.
“자유, 정의, 평화”의 불꽃이 타오르는 광장에서 마지막 거리를 뛴다. 꺼지지 않는 불을 지탱하는 대리석 아래에는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글귀가 교훈으로 남는다.
승리의 여신상을 돌아 Brandenburg 문이 나타났다. 대형 태극기가 흔들며 교민들이 독일 700km 완주를 축하하기 위해 모이셨다. 유럽 최초로 본에서 베를린까지 대장정을 성공했다는 기쁨으로 교민들과 만세를 불렀다.
이번 마라톤의 목적은 교민들에게 공양 대접을 하는 것이다. 교민 외에도 독일 남편과 시어머니, 가야금을 배우는 독일처녀 카트린과 한독가정 2세 아마데우스 등 가족이 함께 하여 특별했다.
고국에 오면 대둔사를 참배하고 템플스테이하고 싶다는 인연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국내 사찰마다 교민들에게 템플스테이 장소로 제공하거나 2세 자녀에게 엄마나라에 대한 교육 장소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야무용단의 가야금연주, 북춤, 아리랑 합창으로 감사의 시간은 가슴 뭉클했다. 언어 장벽과 고된 일들을 이겨내고 눈치 빠르고 예의 바른 약 2만여명의 한국인이 있었기에 오늘날 세계 10대 교역국으로 성장한 조국이 존재하고 있다. 파독 인력송출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한독 수교 130주년을 맞아 한국불교가 적극적으로 교민을 위한 포교전략을 세워 스님을 파견하고 법회를 지원하는 등 유럽교구를 만드는 것이 어떨까?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 스님에 의한 국제선센터가 두 곳이 있는데 대부분 독일인들이 주축이 되어 공부하고 있고, 안거철마다 철야정진법회도 개최하고 있다. 또한 스리랑카 스님에 의해 세워진 유럽 최초의 불교사원이 베를린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불교대학을 운영하고 있으며, 대형 베트남 사찰 건립도 신축중이라 한다.
민간외교의 자부심으로 2011년 다문화 모자원 건립을 위한 한반도 횡단 308km, 2012년 한국과 베트남 수교 20주년 기념 베트남 500km, 2013년 4대강 자전거길 1천km에 이어 이번 독일 700km까지 완주 했으니 다음에는 한일 우호증진을 위해 일본 히로시마에서 도쿄까지 1천km 마라톤을 준비 중이다.
뜻이 있다고 혹은 여건이 만들어진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번 감사의 마라톤은 아시아나 항공과 김진복, 양재칠 두 교민분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 향기로운 냄새를 퍼트리는 향처럼.”
나는 불심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독일 땅에 한국식 사찰을 건립하여 교민과 2세 자녀 그리고 독일인에게 한국을 알리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 그 발원의 씨앗은 이미 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