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개신교 집안서 태어난 소녀, 비구니 되다 (현대불교 16/03/01)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여여심 작성일2016.03.02 조회1,623회 댓글0건본문
▲ 승려가 된 프레다 베디 모습. 사진출처=더 와이어 |
인도인 바바베디 만나 결혼 ‘화제’
간디 지지, 독립운동 등 사회활동
망명 티베트인 복지활동 펼치며
불교와 인연… ‘팔모’ 법명 출가
서양인 최초로 티베트 불교에 귀의한 비구니 스님은 누구일까?
인도 인터넷언론 ‘더 와이어(The Wire)’는 2월 22일(현지시간) 인도 독립을 위해 영국 제국주의에 저항했던 프레다 베디(Freda Bedi, 1911~1977)의 삶을 조명해 주목을 끈다.
영국 개신교 집안서 자란 프레다 베디는 인도의 자유를 외치다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으며, 인도인과 결혼해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많은 시련과 사회적 압박에도 불구, 불의에 맞서 싸우며 영적 깨달음을 위해 마침내 비구니 스님이 됐다.
프레다 베디의 본명은 프레다 하울스톤(Freda Houlston)이다. 1911년 영국 미들랜즈 공업단지인 더비(Derby)에서 태어난 프레다는 독실한 크리스찬 집안에서 자랐다. 그녀의 부모는 감리교 예배당에서 만나 결혼했으며, 시계 수리 및 보석 판매 사업을 하고 있었다.
프레다의 아버지는 그녀가 7세 때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프랑스 북부지역 전투에서 사망했다. 프레다는 매년 휴전을 기념하는 날 행사가 열릴 때 마다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로 심적 고통에 시달렸고, 학교에서 수차례 기절하기도 했다.
프레다는 생전 “아버지의 죽음이 내 어린 시절 전체를 암흑기로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아버지의 부재(不在)는 내면적으로 불안정했던 그가 영적인 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게 한 계기가 됐다.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한 그녀는 정치적인 활동에도 참여했다. 1930년대, 인도는 반영 민족운동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간디를 필두로 한 민족주의자들은 영국이 인도에 자유를 줄 것을, 그리고 경제적 착취를 중단해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요구했다.
유능하고 강단 있던 프레다는 부조리함에 저항하며 친구들과 함께 반영 민족운동에 동참했다. 그녀의 친구 중에는 영국 노동당 대모인 바바라 카슬(Barbara Castle)도 있었다.
정치적 활동 중 프레다는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사랑을 하게 된다. 라호르가문의 시크교 출신의 바바 베디(B.P.L. Baba Bedi)와 만나게 되면서다. 당시는 서로 다른 인종간의 만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풍토가 있었다. 이런 사회적 시선은 그들에게 인종차별에 대한 반항심을 갖게 했고, 둘의 사이를 더욱 단단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프레다 베디와 바바베디는 옥스퍼드에서 1933년에 결혼했다. 슬하에 3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 중 1명은 인도의 유명 원로배우인 카버 베디(Kabir Bedi) 이다.
▲ 프레다 베디(오른쪽)와 남편 바바 베디. 사진출처=더 와이어 |
당시 그들의 결혼은 지역신문 1면을 장식할 정도로 당시 큰 이슈가 됐다. 이후 베디 부부는 인도 북부 라호르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고, 급진주의 세력으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부부는 라호르에서 좌파정치와 출판, 언론에 참여했다. 프레다는 인도로 이주하기 전에도 간디 관련 서적을 출판하는 한편, 좌파 출판업자였던 빅토르 곤잘레즈를 위해 ‘현대 인도’를 주제로 한 책 3권을 출간한 바 있다.
그러던 중 부부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사회주의자로 활동한 바바 베디는 제2차대전이 일어나면서 억류됐고, 1941년 프레다 베디는 간디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라호르 여자 감옥에 3개월간 수감하게 됐다.
그러나 부부의 사회적 활동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부부는 카슈미르에 자리를 잡고, 민족주의자 셰이크 압둘라(Sheikh Abdullah)의 영향을 받아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특히 바바 베디는 당시 중요한 사건이었던 ‘뉴 카슈미르’ 성명서를 써 작가로 인정받았다. 또한 프레다 베디는 인도 북부 스리나가르에 저항하는 여성군대를 이끌었으며, 납치된 여성들을 돕는 활동에 힘썼다.
사회 참여활동에 혈안이 돼 있었던 프레다 베디가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델리로 이주하면서부터다.
1959년 UN에서 활동하던 그는 업무차 미얀마를 방문했을 때 불교를 접했다. 당시 수천 명의 티베트인들이 히말라야에서 인도로 망명했다. 이때 프레다는 젊은 티베트 승려들과 불자들이 새로운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학교를 세우고, 종교시설을 만들어 주는 등 티베트인들의 복지활동에 힘썼다.
이러한 인연 때문이었을까? 1966년 프레다 베디는 유럽 최초로 티베트 불교에 귀의해 ‘팔모(Palmo)’란 법명의 비구니가 됐다. 그녀는 인도 내에서 영성활동을 펼치는 한편, 미국에서는 젊은 티베트 승려들과 함께 새로운 뉴에이지 운동에 가담했다. 함께 활동한 티베트 출신의 승려로는 스코틀랜드에 삼예링 명상센터를 세운 초감 트룽파 린포체와 달라이 라마가 있다.
현재 세계 곳곳에선 프레다 베디를 기리기 위한 다양한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녀가 어린 시절 다닌 영국 더비의 학교에서는 장학금을 마련해 젊은 티베트 승려를 위해 쓰고 있다.
또한 프레다의 고향인 더비에는 프레다 영향으로 펀자브어(인도 펀자브 주와 파키스탄 펀자브 주에서 사용되는 공용어)를 사용하는 민족 공동체가 생겨 거주하고 있으며, 영국 국립 시크교 유산 센터가 설립됐다.
아울러 프레다의 생가(生家)에는 프레다를 기념하기 위한 파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지역민들은 프레다 베디를 ‘국경과 인종을 넘어 정의롭게 활약한 선구자’로 기억하기 위한 추모 캠페인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밖에도 前 BBC기자인 앤드류 화이트헤드는 프레다의 영웅적인 삶을 집필 중이다. 그는 “프레다의 삶은 후대들을 위해 널리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분의 많은 제보를 바란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