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낫한 스님, 파리기후협약의 ‘숨은 영웅’ (현대불교 1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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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여심 작성일2016.02.15 조회1,552회 댓글0건본문
▲ 크리스티나 피게레스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 사무총장은 그가 성공적인 협상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정신적 스승인 틱낫한 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진출처=businessgreen |
힘든 시절 틱낫한 사찰 방문
지혜 갖추며 본업 집중케 해
5년 간 ‘마라톤협상’ 의지처로
세계 시니어리더들 지지 받아와
지난해 12월 파리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단 평가를 받고 있는 크리스티나 피게레스(Christiana Figueres·사진). 그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크리스티나 피게레스 유엔기후변화협약 사무총장은 인터넷언론 ‘허핑턴포스트’와 인터뷰서 “틱낫한 스님 가르침 덕분에 이번 협약에서 성공적인 협상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며 “틱낫한 스님은 파리기후협약의 ‘이름 없는 영웅’”이라고 말했다.
피게레스는 전례 없는 196개국의 지지 속에 유엔기후변화협약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이번 유엔기후변화협약은 ‘지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2주’ ‘화석시대의 점진적 종언 합의’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과학전문지 ‘네이처(Nature)’는 “피게레스 사무총장이 당사국총회 개최와 합의문 도출에 5년 동안 기여해왔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피게레스는 자신의 지혜와 힘, 그리고 연민심을 기르는데 틱낫한 스님이 중추적 역할을 했다며 스님과 인연을 들려줬다.
“3년 전 저는 개인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 전 세계 수천 명의 추종자를 두고 있는 틱낫한 스님의 가르침을 접하고는 ‘아 바로 이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피게레스는 틱낫한 스님의 불교철학 덕분에 위기를 극복하고, 기후변화협상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
“기후변화 협상의 핵심 문제는 전 세계 인구수가 70억 명에서 90억 명 혹은 그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모든 국가, 모든 사람들의 요구를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5년간의 긴 마라톤협상을 하는 동안 제게 휴식이라곤 없었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지지해줄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제가 만약 틱낫한 스님과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긍정적인 생각을 못했을 뿐 아니라 제 임무에 헌신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피게레스는 독일 발드브롤(Waldbrol)에 있는 틱낫한 스님의 사원을 방문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발드브롤 수도원은 원래 700명의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던 공간으로, 2차 대전 당시 나치부대가 그곳의 환자들을 몰살 시키고 히틀러 청소년 부대를 위한 장소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틱낫한 스님은 그 장소에 사원을 건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고통을 사랑으로, 희생자는 승리자로, 증오는 사랑과 용서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이 장소에서 일어난 비인간적이고도 잔인한 일에 몰입해 있었습니다.”
틱낫한 스님이 사원을 세우고 처음 한 일은 그곳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 편지를 쓰고, 비구ㆍ비구니 스님들이 낭독하게 한 것이다.
“우리 승가 공동체는 이곳에서 부당한 일들로 고통 받았던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신들을 고통스럽게 한 사람들 또한 고통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당시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자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연민심으로 그들을 용서하세요. 그러면 스스로도 치유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 승가공동체를 지지해주세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 고통 받는 장소를 치유의 공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피게레스는 “이 일화는 내게 굉장한 충격이었다. 기후협약도 마찬가지로 서로 비난하는 것에서 협력으로 가는 여정이었기 때문”이라며 “틱낫한 스님의 일화는 속수무책의 평행선을 달리던 협상을 잘 이끌 수 있도록 용기를 줬다”고 말했다.
한편, 틱낫한 스님은 서구에서 마음챙김 명상을 이끄는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모든 불교는 삶에 참여한다”는 참여불교(engaged Buddhism) 운동을 주창하며, 민중의 고통을 덜어 주는 실천적 사회운동을 펼쳤다.
베트남전쟁 때는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반전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전쟁 난민을 돕기 위한 사회청년봉사학교를 열어 계속 봉사활동을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1967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받았으나, 불교 평화 활동으로 인해 베트남 정부의 귀국 금지 조치를 당한 뒤, 1973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어 1975년 파리 근교에 ‘스위트 포테이토’를, 1982년 보르도에 ‘플럼 빌리지(Plum village)’를 각각 세우고 명상 공동체 활동을 통해 세계 각국의 비구·비구니들과 평화 및 참여불교 운동을 전개했다. 1990년에는 미국 버몬트주(州)에 승원(僧院) ‘단풍림’과 수행원 ‘그린 마운틴’을 설립하고, 이후 프랑스ㆍ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을 오가며 계속 강연 및 저술 활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