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포체와 함께 떠난 인도순례(보안 스님) ...법보신문 10. 06.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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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10.06.08 조회3,357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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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나는 우연히 티베트의 한 린포체와 인연을 맺었다. 티베트 불교를 처음 접한 것은 10여년 전 승보종찰 송광사에서의 일로, 당시 나는 그곳에서 달라이라마의 환생 스승인 ‘링 린포체’를 보았다. 그 시절 나에게 티베트 불교는 단지 먼 나라의 불교였을 뿐이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시대에 우리의 역사 속에 흘러 들어왔다가 사라져버린 것과 같이 무관한 존재였다. 그런데 어떠한 인연의 힘에 의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티베트 불교가 한국도 아닌 호주 시드니에서 나의 삶 속에 서서히 자리매김하고 있으니 인연의 힘은 참으로 신이하고 대단하다.
꼭 3년 전의 일이다. 어느 날 시드니에 살고 계시는 법일 스님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스님은 시드니에 오신지 20년이 넘은 비구니 노스님으로, 블루마운틴이란 산에 있는 법보사란 한국 절에 주석하고 계시다. 스님은 나에게 부드럽게 권유했다.
“혹시 스님이 계시는 보리사에서 린포체를 모시고 법회를 하면 어떨까요?”
스님의 이 질문에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동의를 하면서 ‘덕킁 갈체 투쿠 린포체’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덕킁 린포체는 보리사 근처의 대만인이 경영하는 불교용품점에서 보았던 티베트 스님이었다. 대만인 주인은 처음 본 나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그 사진 속 주인공이 바로 덕킁 린포체였다. 린포체의 첫 법회에서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가르침과 티베트 불교의 정수를 배울 수 있었고 린포체의 지혜는 한국을 떠난 후 정법을 배울 기회가 없어 답답해했던 내 마음에 단비와 같이 시원하게 뿌려졌다.
지난해 린포체가 호주에 오셨을 때 나는 시간만 나면 시드니에 있는 까규파 센터에 들렀었다. 린포체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드렸었는데 어느 날 차를 마시다가 한 마디 말씀을 툭 던졌다.
“그것이 벌써 25년 전 일이 되었네.”
무슨 말씀이신가 궁금증이 일어 “무엇이요”라고 여쭈었다.
“내가 티베트를 떠난 지가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어. 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스승이신 까르마파께서 린포체로 인가를 하셨지. 어머니 뱃속에 태아로 있을 때 말이지. 어렸을 땐 중국의 공산당이 스님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아예 금지해 몰래몰래 공부를 해야 했어. 그리고 8살 때부터 집짓는 일부터 병원 근무까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지.”
‘한번 와 봐’ 린포체 말에 머릿속 먹먹
차 한잔을 들고 나서 다시 차 한잔을 따를 때까지 아무 말을 하지 않다가 내 눈을 바라보던 린포체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이던가, 다섯 명이서 티베트를 탈출했는데 일주일이 더 걸렸던 것 같아. 모두 허름한 옷을 입고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는 길을 걸으며 히말라야를 넘었지. 그리고 인도로 갔어. 모든 티베트인들처럼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에 가서 달라이라마를 친견했는데 나는 마지막으로 친견을 했지. 달라이라마는 나를 보자마자 ‘다른 사람 눈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라고 하시더니 승복 한 벌과 불상 한 분을 주셨어. 그러면서 시킴에 가서 정식으로 수행 과정을 배우라고 이르셨어. 그래서 시킴으로 가게 된 거야.”
린포체의 얼굴은 아무 변화가 없었다. 무덤덤했다. 차 한잔을 다시 마시고나서 살짝 미소를 짓더니 다시 내게 물었다.
“스님은 어쩌다 호주까지 왔나?”
린포체는 나를 부를 때 한국어로 ‘스님’ 또는 중국어로 ‘파스’(法師)라고 불렀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부터 불교학생회에 참여를 했는데 고 3때 출가를 결심했다”고 하니, 린포체는 “나는 출가를 결심할 필요가 없었어”라며 크게 웃었다.
“어려서부터 탁발하는 스님들께 쌀을 공양 올리고 하여간 불교가 좋았어요. 그러다가 군대 갔다 와서 부모님께는 말을 하지 않고 송광사로 발길을 돌렸죠. 출가 전에 이미 은사 스님을 정해서 다른 데는 생각하지도 않고 곧장 갔는데 아직까지 출가를 한 것에 대해 후회를 한 적은 없어요. 강원 공부를 마치고 해외로만 돌아다닌 지 벌써 10년도 더 됐어요.”
린포체가 가볍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인도는 가 보셨는가?”
“아직 가지 못했습니다.”
“한번 와 봐.”
인도에 오라는 말씀에 나는 머리가 먹먹해졌다. 지우개로 지운 듯 생각이 사라졌다. 늘 가보고 싶었지만 막상 ‘그곳에 갈 인연이 이어지겠구나’하고 생각하니 ‘과연 갈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섰다. 출가 수행자로 살고 있으니 그 언젠가는 가봐야 한다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린포체로부터 들은 ‘한번 와 봐’라는 짧은 한 마디는 무겁고도 깊이 내 마음을 경책하는 듯 했다. 점심 공양을 하고 나서 마당에서 서성이는데 이번에는 린포체의 통역을 맡고 있는 ‘카샹’이라는 시킴 여인이 말을 건넸다.
“시킴에 한번 오세요.”
시킴은 인도를 거쳐야 갈 수 있는 곳이다. 두 사람 모두 나를 인도와 시킴에 오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인연이라고, 아니 필연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가야한다. 가기로 결심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권유에 이끌려 인도에 가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다. 린포체의 권유에는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는 의심이 일었고 나의 심적 수준으로 볼 때 마음의 안팎이 늘 같고 그 크기를 알 수 없는 린포체의 스승인 까르마파는 얼마나 더 대단한 분일까 확인하고 싶었다. 짧은 순간 갈등을 하다가 가기로 결심한 이유이다.
시킴(Sikkim)은 어디인가.
앞으로의 순례 여정에 앞서 시킴이란 지역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우리들에게 인도는 여러 방면에 걸쳐 익히 알려진 곳이지만 ‘시킴’이란 나라는 다소 생소하기 때문이다. 시킴은 역사가 그리 오래된 나라는 아니다. 1975년 영국에 합병될 때까지 1642년부터 12명의 국왕이 통치했었고 인도의 지배를 받은 적도 있다. 그 이전엔 티베트에 ‘남쪽의 비밀스런 땅’으로 알려져 있었다.
8세기경 티베트 불교의 대스승이신 파드마삼바바가 인도의 나란다 대학을 떠나 티베트로 갈 때 시킴지역을 지나갔는데 시킴의 곳곳에 불법과 수행에 관한 경전과 불서들을 봉안해 두었다고 한다. 시킴 사람들은 그것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열심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으며 수행해 왔다. 그들은 시킴은 파드마삼바바의 땅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가 시킴을 지나간 것을 그들 역사의 시작이라고 여기고 있다. 지금은 인도인과 네팔인들이 크게 늘었지만 시킴 사람들은 우리와 가까운 인종으로, 몽골반점이 있고 사용하는 언어도 문법이 거의 비슷하다. 텃밭에 가꾸는 야채의 종류까지 흡사하니 우리와 조상이 같지 않을까하는 공연한 친근감도 생긴다.
우리와 비슷한 시킴 사람들
보안 스님과 함께 인도 순례에 나선 덕킁 린포체가 수행했던 인도 시킴 지역의 룸텍 사원 전경. |
시킴의 특징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어느 집을 가더라도 부처님을 모신 불단과 공간이 있어 집에서 매일 수행을 할 수 있다. 둘째는 평지가 없어서 집이 여러 층이고 한 집에 대가족을 이루고 산다는 것이다. 셋째는 인도 사람들 중 시킴 사람들의 평균 학력이 가장 높다는 사실이다.
몇 생에 걸친 인연의 고리로 시드니에서 덕킁 린포체를 만나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젠 인도 순례에 나서게 되었다. 순례에 필요한 여비도 한국에서 이어진 인연의 힘으로 해결되었다. 순례를 위한 준비가 이렇듯 술술 풀리니 인도 순례에 대한 작은 두려움도 사라졌다.
2009년 12월 4일 밤 10시, 캘커타 공항에 도착했다. 캘커타 비행장으로 린포체의 부탁을 받은 ‘타시’라는 시킴사람이 마중을 나왔다. 시내에 있는 ‘시킴하우스’에서 인도에서의 첫 날밤을 보냈다. 인도의 큰 도시에는 대개 시킴정부에서 직영하는 숙박 시설인 ‘시킴하우스’가 있다. 시킴 사람이 아닌 사람이 그곳에 머물기 위해서는 미리 시킴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내가 머물렀던 방은 1인용 침대가 두 개 있었고 목욕이 가능한 세면장이 딸려있었다.
나를 마중 나왔던 사람과 한방을 쓰게 되었는데 서로 처음 보는 사이인지라 서먹하고 어색했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시킴의 수도 강톡(Gangtok)에 도착할 때까지 20시간가량 같이 있었는데도 서로 대화한 것이라곤 열 마디도 안 되니 묵언 수행이 따로 없었다. 순례 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나를 마중 나온 시킴 사람은 내게 시킴에 오라고 권유했던 ‘카샹’의 오빠였다. 시킴을 여행하는 기간 동안 대부분 그 사람의 집에 머물렀다.
인도 순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부처님의 땅 인도, 오랜 비행기 여행 탓인지 불국토에 왔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 옛날 수많은 선지식들이, 이름 모를 순례자들이 인도에 온 까닭은 무엇인가. 그들은 인도와 시킴을 순례하면서 무엇을 얻어 갔을까. 내일의 순례가 기대되는 인도에서의 첫날밤이 깊어간다. 1000년 전 순례자들 역시 설레는 마음으로 불국토의 어둠을 도반삼아 잠을 청했을 것이다.
시드니 보안 스님 boansunim@hanmail.net
덕킁 갈체 투쿠 린포체는
10생 전 린포체의 수행 단계에 올라갔을 때 당시 스승이며 까규파의 최고 지도자인 까르마파(Karmapa) 7세에 의해 린포체로서의 인가를 받는다. 10생을 모두 티베트에서 태어났고 까르마파로부터 환생을 확인 받았다. 이생 역시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16세 까르마파가 린포체로 인가하였다고 한다. 티베트가 중국에 강제 복속되어 수행자로서 제대로 정진할 수 없었으며 8세 때부터 티베트의 전통병원과 여러 작업장에서 직업 생활을 전전하면서도 틈틈이 수행하였다. 티베트의 독립운동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수차례 투옥돼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1985년 티베트를 탈출해 인도로 망명했으며 두 차례의 폐관 수행을 했다. 현재 인도 북부의 시킴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 등 수 많은 나라에서 전법 활동과 의술을 펼치면서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고 있다.
보안 스님은
나주 출신으로, 고등학교 재학 중 불교에 귀의하였다. 1994년 승보종찰 송광사에 입산해 현전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송광사 강원을 졸업했고 1999년부터 대만과 뉴질랜드의 도량에서 수행 정진했으며 2003년부터 호주 시드니에 정착, 2008년부터 호주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한국도량 ‘보리사’를 등록해 교포들과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경전 강의와 교도소 교화에 매진하고 있다. 한국 전통의 불교와 문화를 호주 사람들에게 홍포하면서 한국 유학생들에게는 지대방과 같은 마음의 안식처를 제공하고 있다.